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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비판④] ‘중보기도’를 오해하거나 폄하하지 말라(2)-이인규의 ‘잘못된 영적 전쟁관’, 김세윤의 ‘땅밟기와 영적 전쟁의 오해’ 비판-
구요한  |  jk05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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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3.27  11: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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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비판④]


‘중보기도’를 오해하거나 폄하하지 말라(2)

-이인규의 ‘잘못된 영적 전쟁관’, 김세윤의 ‘땅밟기와 영적 전쟁의 오해’ 비판-

     


(1에서 계속)

중보기도가 왜 영적 전쟁이 아닌가?
영적 전쟁을 ‘이원론’으로 착각하는 이인규의 오류
‘땅밟기’만 무속적이 아니다. ‘새벽기도’, ‘대심방’도 원래 무속적인 것이었다.
은사 받기 위해 훈련하고 연습하면 왜 안 되는가?
‘중보기도는 비밀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말에 대한 이인규의 오해

나가는 말

 


중보기도가 왜 영적 전쟁이 아닌가?

이인규는 또한 “남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과연 영적인 전쟁인가?”(“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중보기도의 의미”)라면서 중보기도가 영적 전쟁이라는 주장을 비판한다.

이인규는 기도 자체가 영적 전쟁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신자의 믿음생활 자체가 죄와 죄를 타고 역사하는 마귀의 세력과의 영적 전쟁이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마귀의 세력과의 싸움을 영적 전쟁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기도라고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아뢰어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이것은 기초적이고 원론적인 정의다. 성경에 기록된 대부분의 기도도 원하는 것을 구하는 간구기도이다.

그러나 기도 자체가 영적 전쟁인 경우도 있다.

예수님도 금식 기도를 통해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다(마 4:1-11; 눅 4:1-13 등).
힘이 센 귀신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강한 기도가 필요하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약 9:29).

베드로는 잠시 마귀의 시험에 빠졌지만 예수님의 기도로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 32).

그러므로 성경은 신자가 마귀의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여러 곳에서 권면한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 26:41; 막 14:38; 눅 22:46).

신자가 자주 접하는 주기도문에서도 ‘악한 자’로부터 우리를 구해달라는 기도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 (또는 악한 자)에서 구하시옵소서”(마 6:13).

여기서 악으로 번역된 헬라어 ‘포네로스’는 소유격인데 이는 남성이나 중성의 소유격이다. 주격을 남성으로 이해하면 ‘악한 자’ 즉 마귀가 되고 중성으로 이해하면 ‘악’이 된다.

이 때문에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기도이다.
마귀는 갖가지 이유와 핑계를 대면서 신자가 기도하는 것을 방해하고 기도를 하더라도 잡 생각이나 다른 생각을 하게 하여 기도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한다. 요즈음 기도가 잘 되지 않아서 기도가 잘 되는 곳을 찾아다니는 목회자나 평신도도  많다. 그만큼 기도 자체가 치열한 영적 전쟁이다.

타인이나 단체나 국가를 위한 중보기도는 마귀가 더 심하게 방해한다. 오죽 했으면 사도 바울도 영적 전쟁과 연관시키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을까?(엡 6:19).

그런데 이인규는 기도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중보기도가 영적 전쟁이라는 말을 부인한다. 그리고 엉뚱하게 ‘중보자(Mediator)는 ‘화해와 평화의 언약을 중재하는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정의를 갖다 붙인다.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과 사람의 중보자가 되셨는가?
외교적인 말을 잘해서 죄값을 치르시고 마귀의 세력을 제압하셨는가? 아니다. 치열한 영적 전쟁을 통해서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인 취급 받으시면서 몸으로 죄 값을 치르셨고(형벌대속론), 동시에 십자가에서 마귀의 세력들을 일망타진하셨다(골 1:13-14; 골 2:14-15)(영적 전쟁).

그런데 이인규를 포함한 대부분의 전통적인 교회와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속죄사역을 형벌대속론으로만 이해하고 마귀와의 영적 전쟁은 소홀히 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속죄사역을 마귀와의 전쟁으로만 이해하는 귀신파는 비판하면서 정작 자기들은 죄로부터의 구속으로만 이해하는 또 다른 극단을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무엇을 잘못하는 줄 모르고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죄를 없이하심은 물론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 오셨다(요일 3:5, 8).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역 이후에도 구원사역은 죄인을 회개시켜 예수를 믿게 하는 사역이지만 동시에 마귀의 권세에서 자유케하는 영적 전쟁이다(엡 2:2; 행 26:18).

신자들 또한 기도와 순종을 통해 호시탐탐 노리는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약 4:7; 벧전 5:8). 이 모든 것은 말씀 전파와 기도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한 형태인 중보기도가 곧 영적 전쟁이란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오히려 중보기도를 통해 영적 전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다.

필자는 중보기도할 때, 본인이나 가족, 교회 및 나라와 민족의 죄를 대신 회개-물론 그중의 상당 부분은 필자의 개인적 회개이기도 하다-한다. 대신 회개 기도를 동일성 회개(identificational repentance)라고도 한다. 그러면, 때로는 하나님이 특정한 죄를 타고 역사하는 영의 정체나 모습을 보여주신다. 그러면 그 영을 대적하는 기도를 한 동안 한다.

필자가 기도 중에 그 영을 제압하지 못하면 나중에 그 영의 역공을 심하게 받기 때문에 기도 중에 마지막 힘까지 다하여 그 영을 제압하곤 한다. 그러면 일반적인 기도를 했을 때 보다 심신이 녹초가 될 때가 많다.

성령운동파는 이런 기도를 전투 기도(warfare prayer)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특정한 죄목과 그 죄를 타고 역사하는 영을 쫓는 것은, 미국이 이라크의 공격 목표를 정확히 파악하여 정밀 미사일로 공격하는 정밀 타격(Surgical Attack)과 유사하다고 하여 정밀폭격 기도(Smart Bomb Prayer)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정이철은 당연하고 지당한 말만 한다.
‘신자는 우리를 위하여 영적 전쟁을 치르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여 구원을 받았으며 하나님과 바르게 연합하는 것이 영적 전쟁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용납할 수 없는 이상한 기도-중보기도 영적전쟁 기도”).

정이철 식으로 말하면 축구는 너무나 쉬운 운동이다.
축구는 ‘내 편이 상대방의 골대에 공을 차 넣으면 된다’는 식의 주장이다.
내 편이 상대방 골대에 공을 차 넣으려고 할 때 상대 편은 팔짱 끼고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는가?
방해하려고 기를 쓰고 덤벼들지 않는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신자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바르게 연합하는 것을 기를 쓰고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내 안의 죄와 그 죄를 타고 역사하는 악의 영들 아닌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 값을 치르시고, 악의 세력들을 일망타진 하셨기 때문에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물 흐르듯 쉽게 되는가?
아니다. 성화의 과정 또한 치열한 영적 전쟁의 과정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값을 치르셔서 예수를 믿는 신자는 죄의 왕노릇하는 데서는 벗어났지만, 이제는 성령의 능력에 힘 입어 여전히 내주하는 죄의 세력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마귀의 세력과의 전쟁도 마찬가지다.
십자가에서 일망타진 되었지만 마귀는 여전히 이 세상의 임금이자 신(god)으로서 신자의 신앙생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요일 5:19).

영적 전쟁의 땅밟기, 동일성 회개 자체가 복음은 아니다.
전도 하기 전에 기도로 준비하면서 전도 대상자의 마음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듯, 영적 전쟁을 통해 불신자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또한 불신자의 마음을 혼미케 하는 이 세상의 신(神)인 마귀의 영향력을 제거하거나 완화한 후 복음의 말씀을 전하면 복음의 수용성이 훨씬 높아진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고후 4:4).

불신자에게 전도할 때 쉽게 먹혀 들어가는가?
왜 복음에 대해 완악하게 대적하는가? 그 사람의 죄와 죄를 타고 역사하는 마귀가 복음의 전파를 방해하기 때문이 아닌가?

신자가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했다고 해서 신앙생활이 쉬운 것은 아니다.
이미 큰 영적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성화의 과정에서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여기서 말하는 ‘씨름’은 한국의 천하 장사 씨름 대회가 아니다. 헬라어 ‘팔레’인 씨름은 로마의 경기장에서 목숨을 걸고 하는 격투 씨름-레슬링-을 말한다. 통치자들, 권세들,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은 사탄을 총사령관으로 섬기는 대장급, 고수급 악령들이다. ‘우리’라는 표현은 사도 바울은 물론 모든 신자가 목숨을 걸고 마귀의 세력과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과연 정이철을 포함한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런 영적 전쟁이 지금도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중보기도자들이 이런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는가? 영적 후방에서 이런 전투가 있음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정이철, 이인규처럼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벧전 5:8-9상).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정이철 같은 무리들은 주로 위의 두 구절을 대면서 오직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순종하면 마귀는 맥 없이 물러간다고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면 과연 정이철 같은 무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제대로 순종하는가? 낯 간지러운 소리 좀 그만 하라. 논문 표절, 공금 유용, 성 추행, 교회 찬탈, 총회장 부정선거를 밥 먹듯이 저지르고 성령의 새로운 사역을 수시로 소멸하는 자들이 말씀에 제대로 순종한다고?

북한의 김정은 집단이 필부필부를 건드리는가, 자신들을 대적하는 요인(要人)이나 반(反)북주의자들을 건드리는가? 사탄의 무리들도 피조물이기 때문에 능력에 제한이 있어서 자기들에게 무관심하고 집적거리지 않는 정이철, 이인규 같은 무리들은 잘 건드리지도 않는다. 그런 것도 모르고 자신들은 말씀에 순종하기 때문에 영적 전쟁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하는 것은 마귀의 고도의 전략에 기만 당하고 있는 것이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요일 3:8).

이처럼 사람의 죄와 죄를 타고 역사하는 마귀가 신자가 믿음을 갖고 하나님과 바르게 연합하는 것을 끈질기게 방해하고 있다. 영적 전쟁은 이런 마귀의 방해를 제거하여 불신자가 마귀의 혼미에서 벗어나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신자는 의심과 불신에서 벗어나 믿음을 제대로 갖고, 하나님과 바른 연합을 가지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정이철은 영적 전쟁과 믿음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주장하는가? 그만큼 치열한 믿음의 싸움을 하지 않거나 해보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신자의 영적 전쟁을 ‘이원론’으로 착각하는 이인규의 오류

이인규는 신자들이 마귀와의 영적 전쟁을 치르는 것을 이원론(二元論. dualism)이라고 비판한다(“이인규. "이원론을 경계하라”).

이원론이 무엇인가?
상호간에 독립하는 두 세력이 대등한 힘으로 팽팽하게 대립하고 투쟁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성령운동파가 영적 전쟁에 대해서 말하면 마치 이원론을 주장하는 것처럼 오해한다. 이인규는 성령운동이나 신사도운동의 영적 전쟁을 비판하기 전에 전통 교회가 죄에 대해서만 말하고 영적 전쟁에 무관심한 것을 비판하라,

성경을 보라. 성경은 신자가 죄와 싸우고 마귀와 싸우라고 기록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1-12).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벧전 5:8-9).
 

또한, 신자가 벌이는 죄와의 싸움이나 영적 전쟁은 이인규가 착각하는 것처럼 이원론이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구속사역에 힘 입어 마귀의 잔당을 소탕하는 전쟁이다. 비판자들은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마귀의 세력을 제압하셨기 때문에 이후의 영적 전쟁은 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오히려 더 치열할 수가 있다.
불신자가 신자가 되는 순간 신자는 마귀의 세력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이전에는 마귀에게 순순히 응하다가 마귀가 대적하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섬기니 마귀의 세력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그래서 당대에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중보기도자들은 마귀의 공격에 두드러지게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현상을 제2차 대전의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비유한다.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의 성공으로 나치 독일의 기선을 제압하여 전쟁에는 이겼다. 그러나 이후 전개된 1년 남짓의 전투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신자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귀와 큰 전쟁에서 승리하셨다. 그러나 신자 개인은 죽을 때까지 우주적으로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치열한 영적 전쟁은 계속된다. 신자는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에 힘 입어 죄와 싸워야 하고 마귀의 세력과 싸워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해서 ‘이원론’인가?

 

 ‘땅밟기’만 무속적이 아니다. ‘새벽기도’, ‘대심방’도 원래 무속적인 것이었다.
-김세윤의 우문우답
 

정이철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땅밟기가 무속적’이라고 한다.
특히 김세윤 교수는 “한국 교회가 거룩한 전쟁을 한답시고 땅 밟기 기도를 한다고 난리인데, 땅 밟기 기도는 성경에 없다”면서 “한국 교회에 신학이 없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한다. 이같은 행위는 미신적"이라고 지적하고 "미신은 미혹하는 신앙을 의미한다. 근거 없고, 옳지 않는 것으로 사람들을 거꾸러 드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세윤. “땅밟기는 비성경적.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16492; “진정한 의미의 영적전쟁이란? http://blog.ohmynews.com/yedalm/348622”).

필자는 김세윤 교수를 개인적으로 사사(師事)한 적은 없지만 세계적인 신학자로 인정받는 분이라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김세윤 교수가 플러신학교에서 피터 와그너와 찰스 크래프트 교수를 가장 비판하고 대적한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필자는, 김 교수는 자기가 잘 모르는 영적 전쟁이나 성령의 은사 분야에는 침묵을 지켜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왜냐하면 김 교수 또한 무경험에 의한 주장으로 스스로의 영적 무지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안과 의사라고 해서 내과나 치과의 전문 의사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피터 와그너 교수 일행이 ‘에베소의 아르테미스(디아나) 여신 신전 폐허를 밟는 영적 전쟁을 했지만 열매는커녕 오히려 세계적으로 이슬람 식 전쟁과 테러 공포의 위기가 가중되었다’고 비판한다(김세윤. “진정한 의미의 영적 전쟁” http://blog.ohmynews.com/yedalm/348622).

김세윤에게 질문해 보자.
한국 교회처럼 목사나 교인들이 설교, 예배, 기도 많이 하는 나라는 드물다.
그런데 지난 20여년 동안 교회가 더 성장하고 신자들이 영적으로 더 성숙하고 사회가 더 변화되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세는 여전히 답보상태이고, 교계 지도자들의 추문과 추태는 더 심해졌고, 사회는 갈등과 양극화로 혼란을 겪고 있다. 그래서 설교, 예배, 기도가 무의미한 것인가? 
 

왜 김세윤이 이런 우문우답(愚問愚答)을 하는가?

첫째, 김세윤 또한 여타 기적중지론자들과 같이 ‘구약, 복음서 및 사도행전과 같은 기사체보다 바울 서신서와 같은 서신서를 성경 해석의 우위’에 두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사역과 열매, 은사와 품성을 혼동하고 있다.
그 결과 그는 예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으로 마귀의 세력들을 직접 대적하는 것은 무시하고 진리를 행하고 의를 행하는 것만이 영적 전쟁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김세윤. "'땅밟기 기도'는 비성경적").

참된 군인은 전투도 잘하고 규율도 잘 지켜야 한다.
그리스도의 군사도 마찬가지다. 영적 전쟁도 잘 치르고 성령의 열매도 맺어가야 한다. 죄 없으신 예수님도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고(마 12:29) 마귀에게 눌린 자를 고치셨다(행10:38). 예수님도 강한 자를 결박하는 전투를 치르신 후에 복음 전파 사역을 하셨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마 12:29).

그런데 김세윤은 진리와 의를 행하기만 하면 영적 전쟁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무죄하신 예수님이 왜 친히 마귀를 대적하고 귀신을 쫓는 영적 전쟁을 치르셨는가? 그러면,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해야지 왜 모범적으로 해석하느냐?'는 반쪽 신학을 전개할 것이다. 예수님을 포함한 성경 인물들은 교회 시대의 신자들이 본 받을 수 없는 독특한 길도 걸었지만 본 받을 수 있는 길도 걸어갔다. 필자는 후자 쪽이 오히려 더 많다고 믿는다.

실제로 영적 전쟁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멀리서 기도하는 것 보다 현장에 가서 기도할 때 기도가 더 잘되고 ‘돌파’도 더 잘 일어난다는 간증들이 무수히 많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반대자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이봐, 해 봤어?"

상아탑에서 벗어나서 현장에 가서 직접 해 봐라. 생각 보다 어렵고 복잡한 것도 아니다.
 

셋째, 김세윤 또한 당연하고 지당하신 말씀만 늘어 놓는다.
그는 “영적 전쟁의 전쟁터는 우리 실존의 삶이다. 날마다 가치 판단과 윤리적 선택이라는 갈림길에서 사단의 통치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 '영적 전쟁'이다”(“진정한 의미의 영적 전쟁”)고 강조한다.

신자들이 이런 지당하신 말씀을 몰라서 영적 전쟁에서 패배하는가?
머리로는 알지만 실행하지 못하니까 고민이 아닌가? 왜 머리로 아는 것을 실행하지 못하는가? 내 안의 죄와 죄를 타고 역사는 마귀의 세력들이 기를 쓰고 방해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성령운동파가 말하는 영적 전쟁은 김세윤이 말하는 ‘원론’(原論)을 바탕으로 실제로 치열한 전쟁을 치르는 ‘각론’(各論)이다.

원론만 있고 각론이 없으면 공허한 수사(修辭)에 불과하다. 김세윤은 지금 실질적 대안은 제시하지 못한 채 공허한 수사만 남발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예수 잘 믿고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이 영적 전쟁’이란 식의 지당하고 당연한 주장만 늘어놓는다.
 

-새벽기도와 대심방은 토속신앙과 무속신앙을 구속적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또한, 김세윤의 주장대로 라면 한국 교회가 오랫동안 시행해 온 새벽기도나 대심방도 한국 교회에 신학이 없기 때문이며 비성경적이고 미신적인가? 한국 교회의 단골 메뉴인 ‘새벽기도’와 ‘대심방’도 한국 교회의 초기에 무당의 풍습을 본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가?

새벽기도는 한국의 여자들이 새벽 미명에 가족을 위해 정화수를 떠놓고 간절하게 빌던 종교행위와 도교 출신의 길선주 목사가 새벽에 선도식 수행을 하면서 고착된 것이다.

강승삼 교수는 “대심방은 한국의 샤머니즘 문화에서 승화된, 역동적 등가 형태의 상황화 실천신학이라 할 수 있다. 옛날 한국의 마을들에는 대개 무당이나 점쟁이가 있어, 매년 연말연시에 동네를 돌며 심방을 했다. 또 새벽 기도회는 한국의 문화적으로 새벽 치성을 한다는 것에 부합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불당에서 새벽 염불을 하는 대신, 성도들은 하나님께 정성을 모아 새벽 제단을 쌓는 심정으로 새벽 기도회를 했다”고 주장한다”(강승삼, “ㄱ 자 예배당, 성미, 새벽기도-한국적 상황화 신학.” 『크리스천투데이』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72641).

장신대의 김은수 교수도 새벽기도가 토착 종교인 도교에서 유래했다고 말하고, 불교가 기독교에 미친 영향도 자세히 다룬다. 불교가 기독교에 끼친 영향으로 “불교의 ‘천일기도’와 유사한 ‘일천번제’,불교의 ‘복채’’와 유사한 ‘돈’을 봉투에 넣어 심방 때 상위에 올려두는 것, 불교에서 법을 설한다는 ‘설법’(說法)과 유사한 교리를 설한다는 ‘설교(說敎)(기독교 예배에서는 교리를 설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선포’를 하는 것이다) 등이 있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김은수.『비교종교학 개론』. 128-29, 160).
 

자, 그렇다면 김세윤 교수의 주장대로 ‘한국 교회에 신학이 없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필자는 오히려 김세윤 교수가 ‘신학’이 없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저지른다고 본다.

필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이다. 마귀가 하나님의 지식을 먼저 도적질하여 자기를 위해 오남용하고 있다. 신자는 마귀의 관할 아래 있는 불신자의 영혼 구원은 물론 타락한 문화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속해야 한다.”

땅밟기는 ‘지신 밟기’와 같은 무속적 풍속에도 있지만 여리고 성 돌기와 같이 성경에도 있다. 새벽 기도도 무속의 풍습이지만 예수님도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다. 대심방은 무속의 풍습이지만 사도 바울도 선교 여행을 통해 교회와 성도들을 보살폈다. 하나님의 특별 은혜는 일반 은혜를 통해 이루어진다. 불교나 사이비 종교도 찬양하고, 악기를 사용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문서 선교하고 인터넷 선교한다. ‘방법’과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의도’와 ‘내용’이 문제다.

누구의 신학이 옳은가?
마귀나 비성경적 토속신앙이 행하는 관습이나 형식이라 해서 배격하는 것이 제대로 된 신학인가, 그것을 구속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제대로 된 신학인가? 
 

필자가 여러 군데서 누차 지적한 바와 같이, ‘모든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인데 마귀가 먼저 오남용한 것’이 대부분이다.

-쓰러지는 현상은 서인도 제도의 부두교에서 기인한 것이다?
쓰러지는 현상은 최면술이나 장풍에 의한 것이다? 아니다.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도 쓰러진다.

-현대의 찬양과 경배는 나이트 클럽 식 소동이다?
아니다. 교회에서 하나님 앞에서 마음 놓고 기뻐하며 찬양하지 않으니까 그런 곳에 가서 소동을 벌이는 것이다.

-예언하는 것은 점치는 것이다?
아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예언을 흉내내고 오남용하는 것이다.

-찬양을 통해 황홀경에 빠지는 것은 쿤달리니 요가이다?
마약이나 쿤달리니를 통해서도 황홀경에 이르고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통해서도 황홀경에 이른다. 전자 두 개는 후유증이 심하지만 후자는 전혀 후유증이 없다. 필자는 20여년 동안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황홀경을 누리고 있다.

먼저 온 마귀가 도적질하여 오남용한 것을 기독교에서 탈환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하등 잘못된 것도 아니고 이상한 것도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현재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단어’, ‘관습’, ‘형식’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잘 알고 익숙한 것은 ‘내용’과 ‘형식’을 구분하지만 잘 모르는 것은 ‘내용’과 ‘형식’을 동일시하는 논리적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김세윤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면서 오히려 제대로 하는 사람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논리에 의한 비판만 없어져도 한국 교계가 상당히 건실해 질 것이다.

 

은사 받기 위해 훈련하고 연습하면 왜 안 되는가?

이인규는 ‘은사는 성령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나누어주시는 것인데 왜 인위적으로 받으려고 노력하는가?’라고 반문한다(이인규,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중보기도의 의미”).

이 주제는 이미 다른 곳에서도 다룬 적이 있다.

☞방언받기; 훈련을 하면 왜 안 되는가?

물론 은사는 말 그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그러면 내가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알아서 척척 나누어주시는가?

방언 같은 초자연적 은사를 부인하고 비판하는 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성경도 모르고 은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은사는 한 성령이 그 뜻대로 나누어주시는 것이지만 주로 사모하여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전 14:12-13).

은사는 하나님 알아서 주신다는 주장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시기 때문에(마 6:32)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아서 주신다는 주장과 같다. 만일 그렇다면 주님은 왜 그 다음 장에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시는가?(마 7:7)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지만-많은 경우-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령운동파들이 다른 전통파보다 초자연적 은사를 많이 받는 것은 더 잘나고 더 똑똑해서가 아니라 성경 대로 더 사모하고 더 구하기 때문이다.
 

또한 은사는 혼자 구하여서 받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사람의 기도를 통해 얻는 경우도 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행 19:6).

또한, 은사를 받기 위해 훈련하고 연습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인규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설교 잘하는 연습은 괜찮고 은사 받고 방언 받는 연습은 안 된다는 말이 성경 어디에 있는가? 아니다. 설교 잘하는 훈련을 하듯 방언 받고 은사 받는 훈련도 가능하다. 성경에는 오히려 ‘은사를 사모하고 구하라’는 말은 많지만 설교 잘 하기 위해 연습하고 하라는 곳을 한 구절도 없다. 그런데 전통주의자들은 거꾸로 한다.

누가 성경대로 하는가?

그런데 왜 이인규와 같은 엉뚱한 소리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알아서 은사를 주시며, 한 번에 완벽한 형태로 주신다’고 잘못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아무리 하나님이 주시더라도 처음에 완벽하게 주시는 경우는 드물다. 사용하면서 더욱 개발된다. 또한, 사용하는 자가 적극적으로 계속 사용하면 더욱 강해지고 묻어 두고 사용하지 않으면 소멸되기 쉽다.

이 때문에 바울을 디모데가 은사를 소홀히 사용하는 것을 책망하면서 불일 듯 하라고 권면한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붙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딤후 1:6).

“불일 듯하게 하다”는 말은 ‘부채질로 불씨를 키워서 활활 타오르게 하다’(fan into flame, NIV), ‘다시 불이 타오르게 하다’(kindle afresh, NASB)는 뜻이다.

디모데가 다소 내성적이고 소극적이어서 은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점을 염두에 두고 이러 권면을한 것으로 본다. 실제로 방언과 같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를 받았으면서도 개인적 이유나 교회나 교단에서 금지한다고 해서 사용하지 않을 경우 소멸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설교 세미나를 통해 설교 잘 하는 법을 가르치듯, 은사 전이 세미나를 통해 방언과 같은 초자연적 은사를 받는 훈련을 하는 것은 하등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선입견이나 편견이 잘못된 것이다. 필자의 세미나에 참석하여 안수 기도를 통해 방언을 받고 방언 통역을 하고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본 사람이 수도 없이 많다.

 

‘중보기도는 비밀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말에 대한 이인규의 오해

이인규는 “중보기도는 비밀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해괴망칙한 주장이다. 이 신사도운동의 목사들은 무언가 대외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곤란한 내용을 기도하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 “성경을 보면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는 기도가 비밀유지를 하면서 행하여졌다는 언급이 없다”고 비판한다(이인규,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중보기도의 의미”).

이인규도 정이철처럼 늘 ‘지당하고 당연한 말’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기도를 통해 이인규의 개인적 흠이나 잘못을 알았을 때, 이인규는 이 사람이 자신의 흠을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하면서 기도 요청을 했을 때 순순히 오케이 할까?

이인규가 제시한 성경 구절은 일반적인 기도 요청을 하는 구절들이다. 그러나 성경은 개인적인 흠이나 잘못을 지적할 경우, 상당히 지혜로운 방법을 제시한다(마 18:15-17).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첫째, 너와 그 사람만 상대하여 권고하라(마 18:15).
둘째,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증인으로 동반하여 그의 말을 확증하게 하라(16절).
셋째,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공개적으로 말하라(17절상).
넷째,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 취급하여 출교하라(17절하).

만일 어떤 사람이 ‘이인규는 아무 하고나 따지면서 싸우는 것을 좋아한다’면서 개인적 잘못이나 흠을 소그룹이나 교회에 공개기도 제목으로 내놓으면, 이인규는 ‘야고보서 5장16절에 기록된 말씀처럼 나도 허물을 자백하겠다고 할까, 아니면 ‘난 그런 사람 아니다, 그건 나를 잘 모른 사람이 지어낸 트집이다. 당신을 명예훼손이나 허위 사실 유포 죄로 고소하겠다’고 할까?

실제로 전자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고소까지 하지는 않더라도 분을 내면서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질 것이다. 우리 모두 부족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의 허물은 공개될 수 있지만 그것은 본인의 자유의사에 맡겨야 할 뿐만 아니라 지혜도 필요하다. 평양 장대현 교회에 부흥이 임하기 전 길선주 목사가 회개했을 때 회개의 영이 임하여 서방질 하고 도적질한 사람들이 회개했다.

그러나 수십 년 후, 한국의 모 단체에서 집회에서 정기적으로 ‘개인적 죄’를 공개적으로 회개했을 때 후유증이 심각해졌고 기존 교단은 그 단체를 이단이라고 정죄했다. 공개 자백을 통해 배우자의 부정을 알게 된 다른 배우자가 그 배우자를 이전처럼 대할 수 있을까? 또한 교인들이 그 사람이나 그 부부를 이전과 같은 자세로 바라볼 수 있을까? 당위성과 현실은 다른 것이다. 중보기도자가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중보기도자는 기도 대상자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기도 대상자의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흠이나 잘못을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알게 된다. 기도 대상자 본인만이 안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중보기도자에게 가르쳐 주시는 죄,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은 알지만 본인만이 그것이 잘못이나 허물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죄나 허물이 많다.

그런 경우, 중보기도자는 기도 대상자 본인이나 타인에게 드러내지 말고 혼자 중보기도하라는 말이다. 또한 심각한 경우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선지자 나단이 다윗의 죄를 책망한 것처럼, 직접 대면하여-그것도 사적인 곳에서- 책망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런 경우는 예외로 여겨야 할 것이다.

 

나가는 말

이상, 신사도운동 비판자들의 잘못된 중보기도관(觀), 영적 전쟁관을 2회에 걸쳐 간단하게 비판해 보았다. 영적 전쟁을 제대로 다루려면 상당한 지면이 필요하므로 여기서는 필요한 분야만 간단하게 다루어 보았다. 다음 기회에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하나님이 부족한 인간을 통해 주도하시는 어떤 운동도 완벽할 수 없다. 가르침에 다소 오류도 있고 과장도 있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 그리스도 안의 형제로서 상호 건전한 비판은 필요하지만 일방적이고 막무가내적으로 평가절하 할 뿐만 아니라 ‘샤머니즘적,’ ‘귀신적’, ‘이단적’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정이철과 이인규 같은 자들은 도를 넘어도 한참 넘어섰다. 그들에게 부화뇌동하는 자들 또한 불쌍하기 짝이 없다.

이들 모두 하루 빨리 영적 눈을 제대로 뜨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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