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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료] 중보기도’란 용어, 교회에서 사용해도 문제 없다불완전한 인간의 언어는 문맥에 따라 신학적으로 이해하면 된다
구요한  |  jk05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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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3.27  10:2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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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자료]

‘중보기도’란 용어, 교회에서 사용해도 문제 없다

작성자 : 구요한 목사


10여 년 전 교계에서 중보기도라는 용어 사용에 대한 찬반 양론을 적시하다가 유야무야 된 적이 있다. 최근에 다시 다시 중보기도란 용어 사용에 대한 심각한 반대 의견이 있어 그때 필자가 연구한 자료를 다시 게재한다.

 

최근 교계에서는 중보기도란 용어 사용 여부에 대해 찬반 양론이 일어나고 있다.이 와중에서 예장 합동은 교단 총회의 결의를 통해 중보기도란 용어 사용 금지 처분 결정을 내렸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맥락에서 중보기도란 용어의 사용 금지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용어 사용 반대자들의 주장의 일반적인 근거는 이렇다.
예수님만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이시므로(딤전 2:5; 히 8:6 등) 중보기도란 용어는 예수님이 드리는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도에 적합한 단어이지, 사람인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하면 마치 우리가 ‘중보’인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위한 의미의 기도를 표현할 때는 딤전 2:1에 있는 도고기도 또는 청원기도, 이웃을 위한 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용어 사용 찬성자가 없는 것도 아니다. 찬성자들의 주장은 이렇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해왔다. 물론 그리스도는 유일한 중보이시지만 그것은 좁은 의미의 중보이고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이므로 넓은 의미에서 남을 위해 하는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불러도 무방하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용어 사용 찬성자의 입장이었다.
신자가 하는 모든 일-전도, 사역, 목회, 기도 등-이 예수님의 권세와 이름을 위임 받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 상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에 대해 정의만 분명히 해주면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언어란 과학이나 수학 공식처럼 분명한 한계를 가진 것이 아니다.
같은 단어이지만 문맥에 따란 다른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고 다른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같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한 단어의 의미를 지나치게 좁게 정의하여 사용하면 오히려 실제로 많은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소극적인 태도를 바꾸어 중보란 단어의 성경적 연구를 한 이유는 이렇다.

먼저, 용어 사용 반대자들의 주장이 워낙 거세어서, 논란의 핵심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평신도들은 아예 ‘중보기도’ 자체를 부정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아서 중보기도 자체에 회의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교계는 이상하게도 누가 어떤 주장을 힘껏 강하게 밀어붙이면 반대 주장하는 사람들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는 경향이 있거나, ‘너희는 지껄여라, 나는 내 갈 길 간다’면서 뚜렷한 신학적 해명도 없이 이전에 자기가 사용하는 것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경향이 농후한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어정쩡한 상태로 놓아두면, 이미 중보기도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그대로 진행하겠지만, 중보기도라는 용어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목회자나 평신도들은 이제부터는 중보기도라는 용어가 사용된 책이나 자료는 아예 잘못된 것을 간주해버리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다져지고 축적된 중보기도의 Know-How가 하루 아침에 무용지물이 되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는 막아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이 주제를 연구해 본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이렇다.
필자가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인 [글로리아넷](현재 폐쇄)의 자유게시판(68번)에 최근 이x상 목사가 중보기도 용어 사용 반대 의견을 개진한 것에 대해, 필자는 용어 사용 반대자와 찬성자들의 글을 게재하면서 중보기도란 용어를 사용해도 좋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그랬더니 이x상 목사는 유명한 사람의 견해라고 다 옳은 것은 아니므로 필자-구요한 목사-개인의 견해가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추궁했다. 필자는 이런 일은 소모적 논쟁이라 생각하고 피하려고 했으나 ‘혹시나 새로운 무엇이 나오지 않을까? 만일 내가 잘못되었다면 고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서 필자는 잠시 짬을 내어 원어 및 여러 번역본의 성경, 원어사전, 영어사전, 국어사전, 신학사전을 동원하여 중보란 단어를 검토해 보았다.

그 결과 중보기도 용어 사용 반대자들의 결론이 상당히 졸속적이고 일방적이며, 신자가 하는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부르더라도 전혀 성경적, 신학적, 언어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다시 한 번 내리게 된 것이다.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필자는 중보란 용어의 의미와 사용 범위, Mediator(중보 또는 중보자)와 Intercession(중재? 중보? 도고?)의 한글 해석상의 문제, 중보기도란 의미로 사용된 성경의 여러 가지 개념들, 도고기도가 과연 중보기도인가, 중보란 단어의 성경적 신학적 의미와 적용 및 문맥에 따른 단어 해석이란 여섯 가지 관점에서 이 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중보인 모세와 중보이신 예수님
2. 영어로 Intercession의 해석도 ‘중보’ 또는 ‘중재’라는 뜻이다.
3. ‘중보기도’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여러 가지 개념들
4. 도고기도가 중보기도?
5. ’중보’(Mediation,  Mediator)의 성경적, 신학적 의미
6. 문맥에 따른 단어의 의미

부록: ‘중보기도’ 용어 사용에 대한 찬반 입장들

 


1. 중보인 모세와 중보이신 예수님


성경 특히 신약에는 중보 또는 ‘중보자’(Mediator)를 의미하는 단어가 6번 나온다. 중보의 원어는 메시테스인데 원래는 중개인’,  즉(단순히) 대리 사절,  또는(함축적으로) ‘화해자’(조정자), 중재자(딤전 2:5)란 뜻이다.

이 단어가 2번은 모세에게, 나머지 4번은 예수님에게 사용되었다.

-모세에 대해

갈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갈 3:20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그랜드 종합주석』은 ‘중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여기서 ‘중보의 손’을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으나(Origen, Augustine, Calvin), 문맥으로 볼 때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실 때 방편으로 사용하신 모세로 보는 것이 더욱 합당할 듯하다.

즉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천사들의 시중을 받는 가운데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는데. . .그러나 이처럼 모세라는 중보의 손을 빌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율법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주신 복음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이며 그 가치에 있어서도 한계를 지닌다 (p. 559).

갈 3:20도 중보는 하나님의 율법을 인간에게 전해 준 모세를 가리킨다(p. 559). 또한 대부분의 유명 주석이나 단어 사전도 여기서 말하는 ‘중보’는 모세라고 해석하므로 각주는 생략한다. 따라서 중보라는 말이 오직 예수님에게만 사용되었다는 주장은 틀린 것이다. 신약, 그것도 서신서에서 2번이나 모세를 ‘중보’라고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예수님에 대해 사용된 경우이다.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히 8:6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보증인)이시라

히 9: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보증인)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 12:24
새 언약의 중보(보증인)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새 언약이란, 옛 율법에 의해 드려지던 불완전한 동물의 피 제사가 아닌 단번에 속죄사역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피 제사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영생의 약속을 말한다(8:8-12).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에서 성도를 위해 하나님께 친히 간구하는 중보자가 되신 것이다.
 

저명한 주석가인 F.F. Bruce는, 언약(디아데케)과 관련하여 여기서 말하는 ‘중보’는 새 언약의 ‘중보자’(Mediator)는 물론 새 언약을 보증해 주시는 ‘보증인’(Guarantor)(히 7:22)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한다고 말했다(The Epistle to the Hebrews, NICNT, Eeerdmans,1991, 185).

『키틀 단어 사전』도 이런 해석을 지지한다 (Gerhard Kittel and Gerhard Friedrich, translated & abridged in one Volume by Geoffrey W. Bromiley,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588).

『바인즈 성경사전』은 보다 자세하게 설명한다.

메시테스(Mediator, 중보)에 대해. . .
‘중재하다,’ ‘중간’을 말하는 ‘메소스’와 ‘가다’는 ‘에이미’의 합성어인데 신약에서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a) 딤전 2:5에서와 같이, 화평을 위해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하는 사람을 말한다. 물론 이 말은 단순한 중재 이상의 의미도 있다.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는 신성과 무죄한 인성을 갖추신 분만이 중보가 될 수 있다 (*mediate를 중재하다, 중개하다, 조정하다, 화해시키다로 번역했다-필자 주).
(b)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확실하게 얻을 수 있는 보증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라는 말은 새 언약의 보증인이란 말도 포함된다(히 8:6; 9:15; 12:24).

따라서 히 7:22절은 아예 ‘보증’ ‘보증인’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히 7:22-25
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23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2).

물론 중보(자)이신 예수님이 드리는 모든 기도는 ‘중보기도’라고 신학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중보이시기 때문에 중보기도는 예수님만이 드리는 것이라는 주장은 지나친 논리적, 신학적 비약이다. 그런 논리는 물론 신학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신학적으로 맞기 때문에 그 용어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여 “중보기도는 예수님만이 드리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드리는 기도는 중보기도라고 구체적, 명시적으로 기록한 곳은 성경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중보기도는 예수님만이 드리는 기도란 말은 신학적 추론이지 성경적 용어는 아니라는 말이다.
 

‘중보’란 단어와 가장 근접 문맥에 있는 예수님의 기도는 대제사장의 기도, 언약의 보증인으로서 드리는 기도이다(히 7:22-25). 또한 롬 8:26의 기도는 성령님이 드리시는 기도이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성령님이 드리는 기도가 곧 예수님이 드리는 기도이며 따라서 중보기도이다”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단어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면 성경의 다른 구절들은 필요 없게 될 수도 있다.

저명한 신약 신학자인 모이스 실바는 해석상의 이런 실수를 ‘위법적으로 전체적 의미를 전이시키는 것’(부당축의. Illegitimate totality transfer)이라고 부른다 (Moises Silva, Biblical Words & Their Meaning, Zondervan, 1983, 25, 61).

쉽게 말하면 어떤 단어의 한 가지 의미가 그 단어가 의미할 수 있는 모든 의미를 전부 간직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어떤 단어가 한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도 똑 같은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간주하는 해석상의 오류를 말한다.

권성수 교수는 부당축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1. 단어에 있어서 부당축의(不當蓄意) 하지 말라.
자기 의미 아닌 것을 모아서 설명하는 것이 부당축의이다.
예) 베드로가 물에 빠져들 때, "나를 구원하소서" 하는 말에서 '구원'을 설명한다면 부당축의하게 된다.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부당축의할 수 있다.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공부 많이 할 사람일 수록 그렇다. 본문에서 무엇을 말하고 하는가를 가르치지 않고 부당축의한다.

예)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여기서 계시라는 말을 잡고 섥(교)자가 "일반 계시가 어떠하며, 특별계시가 어떠하다" 라고 설교한다면 그것은 부당축의이다.  여기서 계시는 조명에 대한 의미이기 때문이다”(권성수, 「성경해석학 특강」)

말이 났으니까 한 마디 덧붙이는데, 가끔 하나님에 관한 것을 지나치게 거룩하게 하려는 열심으로 인해 의도하지 않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기 쉽다.

예를 들어, 한때 학자들은 신약성경을 기록한 헬라어는 문인들이 사용하는 고급 헬라어인 ‘고전 헬라어’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나님이 거룩한 신약을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발견된 사본들을 통해 신약은 평민들이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하나님은 약하고 부끄러운 것들을 들어 귀하고 강하게 쓰시는 분이다.

또한, 신약의 하나님은 헬라어로 ‘데오스’인데 이 말은 당시 헬라의 ‘신들’(gods)을 지칭하는 말들이었다. 따라서 ‘데오스’는 신약에서 ‘하나님’은 물론 다른 ‘신들’인 귀신을 표현할 때도 사용된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들)(gods)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들)(gods)과 많은 주(lords)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God)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Lord)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6).

위의 구절에서 보면 비록 한글 성경이나 영어 성경은 다르게 번역했지만 헬라어 원어는 하나님은 데오스의 단수형, 신(들)은 데오스의 복수형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주(들)은 퀴리오스의 복수형을, 주 예수의 주는 퀴리오스의 단수형을 사용하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구약에서 하나님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는 ‘엘로힘’인데 이 단어가 ‘다른 신들’ 즉 ‘(귀)신들’에도 그대로 사용된다. 한글 성경이나 영어 성경은 하나님 또는 God으로 표현하지만 원어는 ‘엘로힘’으로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또한, 예수님에 대해 사용된 로고스(Word)는 말씀(word)이란 뜻도 있지만 원래 헬라 철학에서 우주를 구성하는 이성적 원리라는 의미로 사용되던 단어이다.

필자가 왜 이 말을 하는가?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해 사용된 단어라도 단어 자체에 지나치게 엄숙하고 거룩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차피 죄인이자 연약한 인간이 사용하는 단어는 불완전하다. 하나님을 지칭하는 단어들을 거룩하고 성스럽게 취급하려는 의도는 가상하지만 무리한 관심이나 열심은 오히려 문제를 일으킬 뿐이다. 따라서, 일부에서 ‘중보’란 단어를 예수님에게만 한정하여 지나치게 좁게 전문적인 술어로만 해석하는 것은 “부당축의의 전형적인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중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사람인 모세에게도 분명히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만이 중보(자)이시므로 예수님이나 성령님이 드리는 기도는 중보기도라는 비약은 소위 말하는 ‘아이스-제시스’(eisegesis)라고 할 수 있다. 성경 해석은 본문으로부터 의미를 해석해 내는 엑스-제시스(exegesis, 주석)가 되어야 하는데, 아이스-제시스란 내가 규정한 신학적 개념을 성경 구절에 대입시키는 해석상의 오류를 말한다. 성경으로부터가 아니라 내 신학을 성경에 갔다 붙이는 오류를 말한다. 그렇다고 내용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예수님이 드리는 기도가 중보기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는 말이다. 사실 히 7:22-25의 근접 문맥에 의할 때,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기도가 아니라 새 언약의 ‘보증인’이신 예수님의 기도라고 해야 맞는 표현이다.

또한 예수님은 ‘대언자’로서 기도를 드리신다.

요일 2:1-2
1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대언자의 헬라어는 ‘파라클레이토스’로서 ‘보혜사’와 같은 원어이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예수님이 제일의 보혜사이시고 성령님은 또 다른 보혜사이시다.
여기서 개역성경은 왜  ‘대언자’로 번역했는지는 모르지만  영어 성경은 대부분이 Advocate으로 번역했는데 이는 ‘대변자’, ‘변호인’이라는 뜻이다. 우리 말로 대언자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는 예언(forth-telling 즉 대언)과 혼동될 우려가 있으므로 ‘대변자’ 또는 ‘중보자’라는 표현이 오히려 여기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파라클레이토스에는 중보자란 뜻도 있기 때문이다.

파라클레이토스는 당시의 변호인으로서 중보자(Mediator), 위로자(comforter), 변호사(Advocate), 교사(Teacher), 능력주는 자(Enabler), 조력자(Helper), 상담자(Counselor)의 역할을 감당했다. 한편 개역성경의 ‘보혜사’란 말은 보호하고, 은혜주고, 가르치는 자라는 한자 합성어이다.

파라클레이토스이신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새 언약의 중보자이자 보증인으로서, 중보자-이때는 중재자의 의미, 위로자, 변호사, 교사, 능력주시는 자, 조력자, 상담자로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정리하면, 중보라는 단어는 사람인 모세에게도 사용되었고 예수님에게도 사용되었다. 물론 중보자이신 예수님이 드리는 기도 전체를 중보기도라고 신학적으로 추론할 수는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신자가 드리는 기도에는 중보기도란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주장은 논리의 비약이다.

그런 주장이 맞다면, 중보자이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 등에서 스스로를 위한 간구기도를 드리셨는데 이것도 중보자이신 예수님이 드린 기도이므로 ‘중보기도’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간구기도도 드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필자는 이런 주장을 한 사람들의 논거를 이렇게 추정해 본다.
최근 몇 년 동안, 자기들과는 다른 교파의 사람들이 ‘중보기도’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세미나도 자주 개최하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니 ‘이건 또 무엇인가’라고 예의주시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중보기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아내어 받아들이기 보다는 중보기도의 신학적 오류나 용어 사용에 무슨 하자가 없는가를 찾으려고 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오늘날 기사와 이적, 축사와 영적전쟁, 예언 사역을 강조하여 한국의 수많은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미운 털이 박힌 피터 와그너 교수와 그의 지지자들이 중보기도 사역을 강조하니 틀림 없이 신학적 오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중보기도라?

가만히 있자. 예수님만이 우리와 하나님의 유일한 중보가 아니신가?
그렇다면 중보기도는 예수님만이 드리시는 것인데 사람이 중보기도를 드리다니?
이런 신학적 오류가 어디 있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드리는 기도는 이웃을 위한 기도, 청원 기도가 아닌가.’

아마 이런 발상에서 중보기도 사용 금지 발상이 나오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물론 본인들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필자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사용 금지를 주장하는 그들의 신학적 근거가 너무 빈약하기 때문이다.

사실 남을 위한 기도가 ‘중보기도’가 아니라는 사람들은 ‘청원기도’라는 말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에 그런 용어가 어디 있는가? 자기들이 그렇게 이해하니 그런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중보기도’란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그런 의미로 이해하고 사용하고 있는데 무슨 잘못이 있는가?

 

2. 영어로 Intercession의 해석도 ‘중보’ 또는 ‘중재’라는 뜻이다.

딤전 2: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남을 위해 하는 ‘도고, 禱告’(딤전 2;1)의 원어는 엔튝시스인데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이를 Intercession으로 번역하고 있다. 킹제임스(KJVS), 뉴킹제임스(NKJV), 미국표준번역(ASV), 개역표준번역(RSV), 신국제번역(NIV)은 intercession으로 번역했고, 신미국표준번역(NASV)은 petitions(청원, 탄원)으로 번역했다.

원어인 엔튝시스에는 ‘회견’, 즉(특히) 간구, 도고, 기도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이 단어가 단수로 사용된 딤전 4:5에는 한글 성경은 물론 대부분의 영어 성경도 그냥 ‘기도’(prayer)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 단어가 복수로 사용된 딤전 2:1에서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들이 intercessions으로 번역하고 있다.

Intercession은 intercede의 명사형인데 intercede는 inter(사이)와 cede(가다)의 합성어로서, 중재하다, 중간에 들어가 조정하다는 뜻이다. Intercession은 중재, 조정, 알선, 주선, 청원의 뜻이 있다. 한편 성경이 말하는 ‘중보’인 mediator는 중개인, 조정자, 매개자, The Mediator는 하나님과 사람간의 중개자 즉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과 하나님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중보’와 남을 위해 기도하는 영어의 Intercession을 한글로 번역하면 둘 다 ‘중재’나 ‘중보’도 될 수 있으므로 이중적인 혼란이 생긴 것 같다.

두 단어의 의미를 『아래한글 영한사전』에서 살펴 보자

-intercede. 중재하다, 중간에 들어가 조정하다.
-intercession. 1. 중재, 조정, 알선 2. 남을 위한 기도
-intercessor. 중재자, 조정자, 알선자

-mediate. 중간에서 조정, 중재, 알선하다
-mediator. 중재인, 조정자, 매개자, [The M-- ]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 (그리스도).

결국 『아래한글 영한사전』은 두 단어를 거의 같은 의미인 중개, 중재의 의미로 번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사영어사의 『뉴월드 영한사전』을 살펴보자

-intercede. 사이에 들어 중재[조정]하다; 청원[탄원]하다
-intercession. 중재, 조정, 알선, 주선
-intercessor. 중재자, 조정자, 알선자

-mediate. 조정[중재]하다, 알선하다, 화해시키다
-mediator. 중재인, 조정자, 매개자 ; [the M~] 하나님과 사람간의 중개자 (즉 그리스도).

따라서 한글은 mediator와 intercession을 거의 같은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사실 영어에는 같은 단어라도 하나님에 관한 것은 대문자로, 사람에 관한 것은 소문자로 사용한다.

이미 밝힌 대로,  하나님(God이나 신들(gods),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자 메시아이신데 영어로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The Anointed One)이시다. 신자 또한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므로 anointed ones(고후 1:21 등)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신자 중에 나는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단이 아닌 다음에야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에 속한 ‘그리스도인’, ‘작은 예수’라는 말은 자주 사용한다. 이런 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하등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위에서 사전을 통해 밝힌 바와 같이, 오늘날  교계에서 사용하는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mediation이란 뜻의 ‘중보’가 아니라 intercession이란 뜻으로 ‘중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청원기도’란 용어 사용을 권장한 사람들도 intercession의 사전적 의미를 사용하라고 한 것 같다.

사실, 오늘날 중보기도(Intercession 또는 Intercessory prayer)를 하는 개신교 신자들 중에, 로마 가톨릭이 마리아를 구원의 중보자로 여기는 것처럼, 자기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들은 모두 Intercession이란 의미로 중보기도를 사용하고 있다. 중보기도에 관한 대부분의 영어 책들은 중보기도를 intercession, Intercessory prayer로, 중보기도 사역자를 Intercessor, Intercessory Prayer로 표현하다.

 참고로, prayer에는 ‘기도’라는 뜻도 있고, ‘기도하는 사람’이란 뜻도 있다. 기도는 ‘프레어’로 기도하는 사람은 ‘프레이어’로 발음된다. 이처럼 한 단어라도 두 가지 이상의 의미가 있는 단어들이 영어는 물론 한글에도 수두룩하다. 언어란 원래 이런 것이다.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함은 모르고, 단어가 같다고 하여 무조건 사용을 금지하는 것은, 같은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뜻이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고 ‘문맥 중심’이 아니라 지나치게 ‘자구 중심’으로 단어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우리 말로는 ‘중보’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영어로는 분명하게 구분되어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 공식적으로 등극하면 동명이인의 사람들을 강제로 개명시킨다고 한다. 그러나 남한에는 김일성, 김대중, 김영삼이란 이름이 많고, 심지어 문선명 목사(건전한 교단의 목사)도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이 중보이시므로 우리가 중보란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폐쇄적인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사람들인 것 같다.

참고로 중보란 말에 대한 국어사전의 해석을 살펴 보자.

이응백 감수, 『국어대사전』:

-중보 中保 (명) (1) 둘 사이에서 일을 주선하는 사람 (2) <기독> 신과 사람과의 사이를 유화, 매개하는 일.
-중보자 中保者. (명) 중보를 맡아서 행하는 사람, 곧 그리스도
-중개 仲介. (명) (1) 거간, 매개, 주선 알선 (2) 제3자로서 분쟁 당사자의 청에 의하여 그 해결을 위하여 힘쓰는 일.
 

이응백의 사전도 중보란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여러 가지이지만 문맥에서 사용될 때는 한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중보기도’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1번의 의미로, 예수님은 유일하신 ‘중보’라고 할 때는 2번의 의미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문맥에 따라, 사용하는 의도에 따라 다른 의미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언어란 분명하게 구분되는 자연과학이나 수학공식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 의미를 알고 그렇게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언어의 의미를 통제하는 것은 언어학에서 금물이란 상식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3. ‘중보기도’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여러 가지 개념들

중보기도 용어 사용 반대자들은, 딤전 2:1의 예만 들면서 중보란 말 대신 도고란 말을 사용하자고 한다. 그러나 ‘도고’(딤전 2:1)라는 말은 일반적인 국어사전에도 수록되지 않은 희한한 말이다.

중국어성경
딤전 2:1  我勸你第一要為萬人懇求、禱告、代求、祝謝.

개역개정판 성경
딤전 2: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즉 중국어 성경과 한국어 성경의 단어를 비교해 보면, 간구=간구, 도고=기도, 대구=도고, 축사=감사로 대칭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중국어 성경의 도고가 한글 성경에는 기도로, 중국어 성경의 대구가 한글 성경에는 도고로 번역되어 있다.

도고(禱告) 란 ‘구할 도자와 고할 고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말 그대로 ‘고하여 구하다’ 즉 간구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도고가 한글 성경에는 ‘타인을 위한 기도의 의미’로 번역되었는가?
차라리 중국어 성경처럼 대구(代求)로 번역했다면 상당한 오해를 불식시키지 않았을까?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혼란의 이유를 정리해 보면 이렇다.

 -성경은 하나님, 예수님에 대해서나 사람에 대해서나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의미를 문맥으로 해석해야지 자구로 해석하여 한 단어에 지나친 의미를 축의하면 해석 상 사용 상 문제가 생긴다.

'중보'란 단어 외에 영(spirit. 헬라어 프뉴마)이란 단어도 성령, 악령, 사람의 영에 대해 동일하게 사용된다. 그래서 서신서의 영은 모두 대문자 Spirit(성령)으로 해석해야 한다, 아니다 Spirit/spirit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영어의 mediator와 intercessor의 번역이 공교롭게도 한글에서는 동일하게 중보(자), 중개자로 번역된다. 적어도 영어는 이런 점에서 언어상의 혼란은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한글 성경을 번역할 때 영어성경과 중국어성경을 참조했는데 한글에 없는 단어를 번역하기 위해 많은 경우 중국어를 한글로 그대로 음역하여 사용하는 과정에서 용어 상의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성경에는 타인을 위한 기도의 의미로 사용된 표현들이 여러 가지가 있다.
 

-파숫군의 기도(watchman prayer) 곧 보호하고 경고하고, 깨어서 경성하는 기도.

“바벨론 성벽을 향하여 기를 세우고 튼튼히 지키며 파숫군을 세우며 복병을 베풀어 방비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바벨론 거민에 대하여 말씀하신대로 경영하시고 행하심이로다”(렘 51;12).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저희를 인하여 파숫군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느 4: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막아서는 기도(stand-in-the-gap prayer), 중재(보)하는 기도.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고로”(겔 22:30).


-구로하는 기도 또는 해산하는 기도(travailing prayer)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함께 힘쓰는 기도(laboring-with prayer)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 4:2, 3).

’힘쓰다’는 ‘쉬나들레오’라는 은 ‘함께 씨름하다, 다투다, 투쟁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반대자에 대적하여 함께 대항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두 여인은 바울과 함께 공동의 적인 원수를 대적하여 기도의 싸움을 치른 것 즉 바울을 위해 중보기도자로 영적 전쟁을 치른 것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간구하는 기도 또는 강청하는 기도(prevailing prayer)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엘리야의 기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막기 위해 아브라함이 드린 기도.

 

-결박하는 기도(binding prayer). 원수의 세력을 결박하는 기도.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2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9).

-전투 기도(warfare prayer). 원수의 세력을 대적하는 기도

“그 때에 나 다니엘이 세 이레 동안을 슬퍼하며 세 이레가 차기까지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며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넣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니라. . .그런데 바사국 군이 이십일 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군장 중 하나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 주므로”(단 10:23, 13).

(*여기서 말하는 바사국군은 바사국을 관장하는 악령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조상의 죄를 대신 회개하는 기도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느 1:6-7).

“주여 내가 구하옵나니 주는 주의 공의를 좇으사 주의 분노를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열조의 죄악을 인하여 예루살렘과 주의 백성이 사면에 있는 자에게 수욕을 받음이니이다 그러하온즉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 . .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및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단 9:16-17).
 

-영적 부흥을 위한 기도(revival prayer)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눅 2:36-38).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 .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1:14; 2:1-4).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24, 31).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

중보기도란 말은 이 모든 개념을 포함한다. 이처럼 어떤 내용을 개념적으로 이해해야지 자구적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4. 도고기도가 중보기도?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딤전 2:1-2, 개역성경)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과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딤전 2:1-2, 원어에 의한 필자의 개인 번역).

“I exhort, therefore, first of all that supplications, prayers, intercessions and giving of thanks be made for all men, for kings and for all that in authority”(원어에 의한 필자의 개인 번역).

 

필자는 이 구절을 연구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간구, 기도, 도고, 감사는 모두가 “모든 사람과 임금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라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과 . . .”라는 부사구는 ‘간구, 기도, 도고, 감사를 하라’는 동사들을 수식한다는 사실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여기서 말하는 간구, 기도, 도고, 감사 기도가 모두 “모든 사람과. . .”을 위한 중보기도의 개념에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나누어서 정리해 보면 이렇다.

-모든 사람과 임금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간구’하라.
-모든 사람과 임금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모든 사람과 임금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도고’하라.
-모든 사람과 임금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감사’하라.

요약하면, 네 가지 단어 모두가 남을 위한 기도인 중보기도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영어 성경이 엔튝시스를 어떻게 해서 Intercessions으로 번역했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네 단어 모두가 부사절을 통해 중보기도의 개념에 포함된다는 사실은 몰랐던 것 같다. 또한 이 구절에서 도고 기도만 중보 기도의 뜻으로 이해한 사람들도 네 가지 모두가 중보기도의 개념인 줄은 몰랐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가?
성경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단어를 필요에 따라 자유자재로 사용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 단어의 진정한 의미는 문맥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엉뚱한 해석을 초래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중보기도’라는 말 대신 ‘도고기도’나 영어 Intercessions의 번역을 의미하는 ‘청원기도’라는 말을 사용할 것을 권면 것은 성경적, 신학적으로 합당한 주장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구절의 정확한 해석에 의할 때, 남(타인)을 위한 간구, 타인을 위한 기도, 타인을 위한 도고, 타인을 위한 감사라는 표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중보’(Mediation,  Mediator)의 성경적, 신학적 의미

사실 중보의 행위는 ‘중보’로, 그런 행위를 하는 자는 ‘중보자’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개역 성경은 그냥 ‘중보’라는 단어로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하는 것 같다-이응백의 ‘중보’의 의미를 보라. 1번은 사람이고 2번은 행위로 설명한다, 그리고 2번의 행위를 하는 자를 중보자라고 한다.

『복음주의 신학사전』은 ‘중보와 중보자’(Mediation and Mediator)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Walter A. Elwell, Editor,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Baker Book House, 1994, pp. 701-702).

“중보는 대적(원수) 관계에 있는 양방을 화해시키기 위해 중간에 끼어드는 것을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중보는 죄인을 거룩한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구약에서 중보는 선지자나 제사장의 직임으로 간주되었다.

선지자는 계시, 교육 및 경고의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대변(또는 대표)했다(출 4;10-16; 렘 1:7; 암 3:8). 제사장은 대신 기도-중보 기도-와 희생 제사를 통해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간구했다(신 33;10; 히 5:1).

신약에서 ‘중보자’라는 말은 6번 사용된다.
2번은 모세가 율법의 중보자라는 뜻으로 사용된다(갈 3:19-20). 이 단어는 히브리서에 3번 사용되는데 예수님이 ‘더 나은 언약’ 즉 ‘새 언약’의 중보자이심을 표현한다(히 8:6; 9:15; 12:24).

새 언약이 옛 언약에 비해 월등하게 낫다는 것을 설명한 후 히브리서 기자는 새 언약의 시작과 함께 중보자가 필요한데 이분은 곧 그리스도이심을 밝혀준다(히 8:6).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셔서 새 언약 시대를 여신 후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셨다.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가장 잘 요약하는 구절은 딤전 2:5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중보라는 단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하는 이들 구절 외에 신약은 그리스도가 중보자이심을 밝히는 구절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스도는 선지자로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대변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다(요 1:18; 6:60-69; 14:9-10). 그분은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우리를 대변하셨다. 그분은 제사장이시자 희생 제물이셨다(히 2;17; 7:26-27; 9;11-15). 그분은 스스로를 위한 기도는 물론(마 26:39, 42, 44; 막 14:36, 39; 눅 22:41, 44; 요 17;1-5; 히 5:7), 제자들과(눅 22:32; 요 17:6-26),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다(롬 8:34; 히 7:25; 9:24).

따라서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한 진정한 대변자이시며(요 1:1-5; 고후 5:19; 골 2:9; 히 1;2; 5:5), 동시에 참 사람이시므로 우리를 위해 대변해주시고 또한 우리를 동정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시다(히 2;17; 4;15; 5:1-9).”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구약의 신자들이 앞으로 오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했다면 신약의 신자는 이미 오신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러므로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권세와 사명을 위임 받은 ‘중보자’로서 선지자와 제사장의 직분을 지금도 감당하고 있다.

우리는 불신자와 신자들에게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침으로써 선지자의 직분을 감당한다. 우리는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불신자의 전도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한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권세와 사명을 위임 받은 ‘작은 예수’, ‘작은 중보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우리가 문자적으로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이 말은 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성화의 모델은 구속주이시자 사람이신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야 하고,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야 한다. 우리가 하는 구속적인 모든 일은 예수님이 하신 일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2).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은 예수님에 관한 언급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따르고 추구해야  모본이다.

서신서는 대부분이 전반과 후반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은 하나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교리적으로 설명한 후, 후반에서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와 함께 ‘너희도 그렇게 되라’ ‘너희도 그렇게 하라’ 명령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서술이 우리에 대한 명령이 되는 것이다(Divine indicative is human imperative). 이것은 무슨 말인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닮으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 전도 대위임 명령을 내리셨다.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 시 제자들에게 실제로 사역의 시범을 보이신 후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하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본 받아야 하고, 예수님이 위임하신 권세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이 하신 일을 계속 이루어 가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그리스도 안에서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인 신자들이 왕 중의 왕, 그 선지자 및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하신 일을 위임 받아서 한다고 해서 하등 잘못된 것은 없다. 신자가 하는 모든 일이 예수님을 위해, 예수 이름의 권세에 힘입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는 ‘작은 예수’, ‘작은 중보자’인 것이다.

 

6. 문맥에 따른 단어의 의미

이x상 목사는 ‘중보’라는 단어에 다른 의미도 있지만 예수님에게만 적용되는 의미로만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편이고, 필자는 같은 단어지만 두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에 문맥에 따라, 사용하는 의도에 따라 다른 의미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필자의 의견은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의 차이, 또는 문맥에 따라 의미를 구분하여 사용할 것을 제시한 몇몇 분들의 견해와 동일한데 이것이 정상적인 단어 해석의 방법이다. 한 단어지만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원칙을 모르면 성경의 단어 해석 자체가 엉망이 되어 버린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믿다’ ‘믿음’이란 단어는 문맥에 따라 피상적이고 지식적인 믿음(약 2:19), 구원 얻는 믿음(요 3:16), 은사로서의 믿음(고전 12:9), 열매로서의 믿음(갈 5:22)이 있다.

이들을 문맥에 따라 의미를 구분하지 않고, “오, 믿음, 구원 얻는 믿음”으로 정의하여 아무데나 이런 의미를 투입 시키면 그야말로 성경의 의미는 엉망으로 될 것이다. ‘믿음’을 다만 ‘구원 받는 믿음’으로만 이해하여 믿음이란 단어를 볼 때마다 그런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앞에서 밝힌 바 있는 “부당축의”, 성경이 말하는 바를 말하는 '엑스제시스'(exegesis)가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의미를 성경 구절에 갔다 붙이는 아이스-제시스(eisegesis)이자 '부당축의'가 된다.

물론 중보기도란 말이 개역성경에는 없지만 표준새번역에서는 국어대사전에도 없는 희한한 ‘도고’(딤전 2;1)라는 말보다는 대부분의 영어성경이 사용하는 Intercession을 중보의 기도로 번역하고 있다.

표준새번역 성경
딤전 2:1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와 기도와 중보의 기도와 감사를 드리라고 그대에게 권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에 힘입어 하나님과 피 중보자 사이에 끼어들어 ‘작은 중보자’로서 드리는 기도, Intercession이라는 의미로서의 기도,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이신 예수님의 의미가 아니라 신약의 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부른다고 해서 성경적, 신학적, 언어적으로 하등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중보기도란 단어는 오늘날 전통적, 보수교단에서도 폭 넓게 사용하고 있는 단어이다.
한떄 예장 xx에서 중보기도란 단어 대신 청원기도란 단어 사용을 결의했지만 대표 교회라고 할 수 있는 S교회의 홈피에는 여전히 중보기도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신자들도 ‘중보기도’란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성경적, 신학적, 언어적 근거를 밝혔지만 그렇다고 특정한 단어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글을 통해 중보기도란 단어의 사용을 금지하는 사람들의 성경적, 신학적 근거가 철저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밝혀보고자 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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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중보기도’ 용어 사용에 대한 찬반 입장들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필자가 그간 나름대로 모은 자료들을 정리해 본다.

1. 국민일보

[예장 합동] ‘중보기도’ 용어 쓰지 마세요…‘이웃 위한 기도’ 등 권장--------

예장합동 총회신학부(부장 하구봉 목사) 제4위원회는 ‘중보기도’ 사용중지 결의와 관련해 교단 내에서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자 최근 공고문을 내고 ‘중보기도’ 용어대신 ‘합심기도’‘이웃을 위한 기도’ 등으로 사용해줄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위원회는 이 공고문에서 “지난 84차 총회에서 타인을 위한 기도를 중보기도라 할 수 있느냐는 헌의가 올라왔고 85차 총회에서 중보기도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기도에만 사용되어져야 할 것이다”면서 “타인을 위한 기도를 ‘합심기도’‘이웃을 위한 기도’‘부탁기도’ 등으로 사용하는 게 합당하다고 결의했다”고 밝혔다.

이같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현재 총회 산하 일부 교회 등에서는 ‘중보기도’ 용어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계속 사용하자 총회 차원에서 공고문을 발표한 후 대책마련에 나섰다.

그러나 기장 등 일부 다른 교단 목회자들은 이에 대해 “굳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중보기도’란 용어에 대해 문제삼을 필요가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모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보라고 할 수 있다”고 밝혔다.

결국 예장합동 신학부가 제기한 ‘중보기도’논쟁이 한국교회 전체 교단으로 확산되기는 다소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2002.06.30)
 

2. 국민일보 

국내에서 중보기도 사역자로 알려진 전xx 목사는 특히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경우 중보기도를 아무런 문제없이 사용하고 있다면서 기존의 중보기도가 갖는 함축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는 마땅한 대용어가 없는 상황에서 용어 사용을 일방적으로 금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2002, 07.19).
 

4. 현대 종교

"그러나 이를 두고 (예장 합동의 중보기도 용서 사용 금지에 대해) 감리교신학대학교 조경철 교수(신약학)는 "기독론적 측면에서 '중보기도'를 이해한다면 '중보기도'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 용어를 '남을 위한 기도'라고 광의적으로 정의한다면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밝혀 신학자들 사이에 '중보기도'용어 사용과 관련한 논의가 계속 될 것으로 보인다."
(2002.8, p. 167).
 

5. 월간 목회

『월간 목회』 2001년 3월 호는 특집 ‘중보기도, 무엇이 문제인가’에서 중보기도에 대한 중견 신학자와 목회자들의 견해를 실었다.

필자들은 근래 한국 교회에서 부쩍 사용 빈도가 많아진 ‘중보기도’란 용어에는 신학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데 대체로 동의했다. 이들은 또한 ‘중보기도’란 용어상의 오해의 소지를 인지하고 조심하면서 남을 위해 기도한다는 그 본의를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서도 대체로 같은 의견을 보였다.

-박형용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는 “우리의 중보는 오로지 예수님 한 분이시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를 위한 중보기도는 예수님 만 하실 수 있다”는 성경적,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박 교수는 남을 위한 기도를 ‘도고’(개역)라는 용어 대신 ‘중보’(표준새번역 등)로 부르게 된 데는 일부 한글 번역 성경이 이 두 용어를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도고’를 ‘중보’의 의미가 담긴 인터세션(intercession)으로 번역한 흠정역(AV)의 영향이 한글 성경 번역 과정에 스며들었을 가능성을 추론했다.

그러나, 박 교수는 “그 동안 관습이 ‘다른 사람을 위해 특별히 기도한다’는 의미로 중보기도를 사용한 만큼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며 “신학적 혼란을 피하고 신앙생활의 정리된 관습을 창조해 나가기 위해” 중보기도라는 이중적 의미가 들어있는 용어 대신 ‘도고’나 ‘다른 성도들을 위한 간구’ 같은 표현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신성종 목사(미주성산교회)는 중보기도를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로 구분했다. 신 목사는 좁은 의미의 중보기도는 ‘중보자로서의 기도’를 의미하며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지만, 넓은 의미의 중보기도는 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신 목사는 넓은 의미로서의 중보기도의 뜻만으로 사용해야 할 사람들이 마치 자신이 중보자나 된 것처럼 사용함으로 인해서 이단적인 방향으로 가는 경향도 없지 않다는 지적도 함께 했다.

-고영민 교수(기독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역시 중보라는 단어는 이중적으로 쓰여지고 있다며 중개나 중재라는 뜻의 일반적인 의미라면 오늘날 교회 안에서 시행되고 있는 ‘중보기도’라는 명칭은 아브라함이나 모세 등이 드렸던 것과 동일한 기도의 형식이므로 하등의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물론 “그것이 중보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만이 드릴 수 있는 대속적인 중보의 기도라고 한다면 결코 사용되어져서는 안될 것”이라고 고 교수는 못박았다.

(월간 목회의 세미나 내용 요약).
 

6. 기독연합신문

"바른 말 고운 말-중보기도와 도고

오늘날 한국교회의 교인 대부분이 남을 위한 기도를 ‘중보기도’(仲保祈禱)라고 쓰고 있다. 성경 디모데전서 2장1절에 타인을 위한 기도를 ‘도고’(禱告)라는 말로 적고 있음에도 중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우리의 중보자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구속적 중보사역을 모방 인용하여 사용하는 듯 하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사용일 수 없다.

중보(仲保)라는 말은 오직 예수님께만 한정하여 사용해야 할 것이다. 디모데전서 2장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하여 중보의 유일성(唯一性)을 말하고 있다.

이 중보의 본질적인 뜻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예수 그리스도의 본직(本職)으로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속죄적 구속의 위대한 사역을 의미하는 고로 예수님만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중보는 절대 의인이 죄인을 위한 절대적 사랑의 행위인고로 죄인인 인간이 또 다른 죄인인 인간을 위해서 ‘중보’할 수는 없다.

어느 양자 사이의 중재적 역할이라면, 도고(禱告:intercession)즉, ‘이웃을 위한 기도’(Prayer to God for Neighbor:NIV)의 뜻을 가진 용어 사용이 성경적일 것이다. 도고(딤전2:1)의 원래 뜻은 ‘탄원’‘기원’(헬, enteuxis)의 뜻을 가진 말이고, 중보자(헬, mesites, 영, Mediator)라는 말은 예수께 대하여 쓰는 말이다. 만약 ‘중보기도’라는 말이 사람에게서 사용이 가능하다면 그 기도자는 그 기도에 있어서 중보자(중보기도자)가 되는 셈이다. 중재자(intercessor)와 중보자(mediator)는 구분되어야 한다.

중재자는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평행적(平行的) 관점에서 하나님께 탄원하는 기도자이고, 중보자는 예수님이 인간을 향한 수직적(垂直的)관계에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서 유일한 구속적 행위자이다. 그런고로 중보자는 ‘약속하신 자’(히3:19), ‘언약의 중보자’(히 3;20, 8;6, 9;15), ‘피의 중보자’(히 12;24)로 기술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중보하는 행위는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이 중보의 대표적인 뜻이다. 교인이 공동체적 관계에서 이웃을 위한 기도는 ‘도고’(禱告)가 되어야 하거나 굳이 쓴다면 ‘중재기도’(intercessory prayer)라고 써서 중보와는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직인 중보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는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뭇 사람의 죄를 지고 홀로 죽은 일을 중보라 하므로 중보기도는 중보자의 기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로마서 8장34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 위하여 간구하심”이 바로 중보기도일 것이다. 그러므로 중보기도라는 표현은 ‘도고’ 또는 ‘중재기도’라는 용어로 갱신되어야 한다. 어떤 유형의 기도이든지 그것은 인간의 신앙과 예배행위이지 인간이 인간을 위한 중보행위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김석한-기독신학 부학장, 제 696호 2002년8월4일)
 

7. 기독연합신문

'중보기도' 용어 사용 말라

“중보기도는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기도에만 사용돼야 한다. 그러므로 타인을 위한 기도, 이웃을 위한 기도로 사용함이 합당하다”.

예장 합동총회 신학부(부장:하구봉목사)는 중보기도를 예수 그리스도만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결의한 총회 결정을 재확인하고, ‘중보기도 사용 중지’를 강력히 요청했다. 예장 합동총회가 중보기도 용어문제를 다룬 것은 지난 99년에 열린 제84차 총회 때. “타인을 위한 기도를 중보기도로 사용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라는 헌의안을 접수하면서부터다.

당시 총회는 1년간 연구하도록 지시했으며 이듬해 열린 85차 총회에서 “중보기도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라며 ‘이웃을 위한 기도’‘ “합심기도’‘ “부탁기도’로 사용할 것을 정식 결의했다. 그리스도만이 중보자이기 때문에 중보기도 역시 그리스도만 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 것.

예장 통합총회 기독교용어연구위원회 위원장 정장복교수(장신대)는 “예장 합동총회의 결의는 매우 바람직한 것으로 수년 전부터 보인 교회용어 혼란을 바로 잡는 결정”이라고 밝히고 올 9월 열리는 예장통합 87차 총회에서 이 문제를 다룰 예정이며 합동총회처럼 중보기도 사용을 중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중보라는 말이 성경에서 있는 것이니 만큼 우리가 성경이 의도하는 뜻과 다른 개념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는 입장.
 

기독신학교 김석한 교수도 “디모데전서 2장1절을 보면 타인을 위한 기도를 ‘도고(禱告)’라고 분명히 쓰고 있으며 2장5절에는 그리스도를 유일한 중보자라고 써 교회에서 중보기도를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관행”이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중보가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 사이의 관계회복을 뜻에 담고 있어 인간 사이의 기도를 의미할 수는 없다”고 단언했다.
(윤영호차장, 제 696호 2002년8월4일)

 

8. 크리스천 헤랄드 

중보기도(中保祈禱)와 도고(禱告)
 
디모데 전서 2:1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I urge, then, first of all, that requests, prayers, intercession and thanksgiving be made for everyone, NIV)라고 되어있다. 영어로 Intercession을 한글 개역성경은 도고(禱告)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공동번역에서는 "간청"으로, 새 번역에서는 중보의 기도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딤전 2:5을 보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中保)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니라"고 되어있다. 또한 히12:24을 보면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고 되어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유일(唯一)하신 중보자(中保者, Mediator)라고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중보기도(中保祈禱)란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중보자(中保者)되시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시는 기도를 말하는 것인 줄 안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시고, 우리 인간은 마귀의 자녀이며(요8:44),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죄인이므로(롬3:23), 우리,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중보자(中保者)가 될 수 없으며, 또한 중보자 없이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에는 반드시 선지자(先知者)를 통하여 말씀하셨고,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께 제사(祭祀)를 드릴 때에는 반드시 제사장(祭司長, Priest)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악(惡)하고 추(醜)하고 더러운 죄 많은 우리 인간들은 거룩, 거룩, 거룩하신 하나님께 결단코 직접 나아갈 수 없었으며, 직접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수도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구약의 성막(聖幕)에는 지성소(至聖所)와 성소(聖所)가 있었으며, 지성소(至聖所)와 성소(聖所) 사이에는 휘장(揮帳)이 있었고,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에는 결코 아무나 들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대 제사장도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일년에 한번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성소에도 오직 제사장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제사장들도 반드시 물 두멍에서 손을 씻고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들은 결코 직접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 제사장 되시는 예수께서는 (히3:1)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만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죄인인 우리를 중보하시는 유일(唯一)한 중보자(中保者)가 되시며(딤전2:5, 히12:24), 대 제사장이 되시므로(히3:1),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시는 기도만이 참된 중보자로서의 중보기도(中保祈禱)인 것이다. (요17:9-26, 롬8:34).

다만 기도하는 사람이 중보자되시는 예수님 같이 성령 충만하여, 성령 안에서 남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만(마5:48, 요13:34) 우리도 예수님 같은 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 줄 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남을 위하여 드리는 모든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참된 의미의 중보자(中保者, Mediator)로서의 중보기도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남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를 중보기도(Mediator's Prayer)라고 말하는 것 보다 도고(禱告, Intercession)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줄 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懇求)와 기도(祈禱)와 도고(禱告)와 감사(感謝)를 하되"(딤전2:!)하고, 남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를 도고(禱告)라고 말하고 있다. 중보기도라는 말은 신구약 성경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성경에 없는 말인 것이다.

(김정복 목사, WMC 기도학교 담임교사, 2002/5/30)

 

9. 『글로리아넷』 자유게시판에 게재된 이x상 목사의 주장 :

중보기도에 대한 이x상 목사의 주장

중보기도는 예수님만의 고유 권한의 기도입니다.
기도에는 세가지 방법의 기도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인하여 왕 같은 제사장의 칭함을 얻은 우리는 그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를 <기도와 간구>라고 표현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남을 위한 기도입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의 구원받은 은혜를 감사하여 이제 남을 위하여 돕는 기도를 할 수있게 하셨습니다.
이 기도를 <도고와 감사>라고 표현 하였습니다.

세 번째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는 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에서 기도한다는 말인데 죄인을 하나님께 변호하는 기도입니다.
즉 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지만 자신이 지신 십자가에 피로 대속하겠으니
저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되게 하옵소서 라고 변호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표현 하였습니다.
-중보란 뜻은 국어사전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1. 둘 사이에서 일을 주선하는 사람.
(이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문제를 중재하는 부동산이나 법관이나 중매쟁이등등을 말합니다.)
2. 신과 사람과의 사이를 유화(宥和). 매개(媒介) 하는 일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종교를 말하지않고(석가모니나 다른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그리스도는 신과 사람과의 사이에 서서 십자가에 죄없이 죽었다가 부활함으로서 인류를 구제하였음.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또 중보자란 뜻은 국어사전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중보를 맡아서 행하는 사람, 곧 그리스도 라고 기록되어 있고, 동아 국어사전 이기문 저에는 크리스챤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라고 말하면 카톨릭도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은 고해성사가 있지요. 그래서 신부에게 고하면 신부가 기도하고 용서하면 죄가 사해진다는 행위 때문에 중보의 역할을 하고있는데 이것은 요한복음 20장 23절을 근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그러나 이 구절은 우리가 전도하여 복음을 전하면 그 복음을 듣고 구원으로 인도을 받을 것이요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구원 받을 자들이 복음의 소식을 듣지 못해 죄사함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는 제자들이나 우리 신앙인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고취시키고자 말씀하신ㄹ 것입니다.
그래서 고해성사도 카토릭(가톨릭)이 이단이라는 증거에 일부분을 찾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는 예수님 외에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기도 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남을 위하여 기도 한다는 충정아래 중보기도를 한다고 하면 이것은 자신이 예수가 되겠다는 참으로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속의 은혜를 희석시키는 무래[례]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신부들보다 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혹시 국어사전에 1번으로 말한 사람과 사람사이를 중재하는 뜻을 잘못 알고 사용하였다면 분명히 교정하십시요. 원어 성경이나 영어 성경이나 어떠한 바이블에 관한 기록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의 중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위하여 라고 하는 뜻을 가진 <도고 기도>가 불(분)명히 명시되어 구분하고 있으매 대신이라는 뜻을 가진 <중보기도>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는 금해야 합니다.
잘못된 해석의 글이나 말이 교회에서나 책자나 인터넷에 너무나도 많고 그것을 합류화 하는 것도 비일 비제(재)하게 많습니다. 중보 기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고유권한의 기도다 라는 것을 다시금 인식합시다.

더 상세한 내용이 많으나 이 정도만해도 확실한 증거이며 그래도 의문이 있으면 메일에 올려주세요.
(이x상 목사, 자유게시판 68번-2002-08-21).

 참고로 이x상 목사는 필자의 반론 글을 읽은 후 자신의 글을 인터넷에서 내리고 이후 조용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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