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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Q & A] 성령의 기름부음의 구체적 결과기름부음이 임하면 말씀, 찬양, 기도에 능력이 붙고 신앙생활이 새로워진다
구요한  |  jk05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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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3.26  15: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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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Q & A]

성령의 기름부음의 구체적 결과

기름부음이 임하면 말씀, 찬양, 기도에 능력이 붙고 신앙생활이 새로워진다 

 

언젠가 집회 중에 성령을 초청했다.
잠시 후 집회 장소는 성령의 아름다움과 행복으로 가득 찼다. 집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에 젖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령께서 이렇게 아름답게 임하신 것을 체험한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필자도 그랬다.

그러던 중 필자의 영안이 열려서 집회에 참석한 어느 소녀가 꽃 동산에서 노는 모습이 보였다. 또 어떤 자매는 믿음 생활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 집회 이후 자기도 모르게 ‘어떤 말’이 튀어나왔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말인 줄 금방 알았다고 한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사람에 따라, 때에 따라, 장소에 따라 다르게 역사하신다.
때로는 치유의 영으로, 때로는 위로의 영으로, 때로는 회개의 영으로, 때로는 예언의 영으로, 때로는 이 모든 현상들이 한꺼번에 일어나기도 한다. 성령께서는 뜻대로 역사하신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성령이 물건이냐, 오라고 한다고 오시게?”
“‘성령을 나누어 준다’고 하는 성령 복덕방 같은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령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 사람이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다.”

그럴 듯한 말 같지만 이는 말씀도 모르고 능력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일선의 전쟁터에 나가 있는 중대장이 사령관에게 지원 병력을 요청하여 사령관이 병력을 추가로 파견할 때 중대장이 사령관을 좌지우지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성령을 초청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반대자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인 것처럼 말하기만 하면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주의 종들의 초청이나 안수에 의해 성령을 나누어 주신 기록이 많다.

-모세가 안수했을 때 여호수아가 성령을 받았다(신 34:9).
-엘리사가 불을 초청했을 때 하늘로부터 불이 임하여 번제물과 물과 돌과 나무와 흙을 다 태웠다(왕상 18:36-37).
-오순절의 성령 강림도 예수님의 약속이기도 하지만 120 문도가 일심으로 기도할 때 임했다(행 1:14; 2:1).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제자들이 간절히 기도했을 때 모두 성령 충만을 받았다(행 4:31).
-안수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다(행 8:17; 9:17; 19:6).
 

어떤 사람들은 기도나 안수로 성령을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성령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렇다(민 27:18; 신 34:9; 딤후 1:6; 행 4:8, 31 등). 다소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행 10:45), 이미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한 신자들의 경우 비록 성령은 받았지만 안수나 성령 초청을 통해 은사적, 체험적 성령을 다시 받거나 활성화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성경은 신자들에게 계속하여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한다(엡 5:18).

그러나 이렇게만 설명하면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께서 성령을 나누어주신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행 2:33). 만일 신자가 성령을 받는 것이 신자 속에 이미 있던 성령을 활성화하는 것뿐이라면 오히려 하나님은 상관없이 사람이 나누어주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성령이 이미 임했기 때문에 성령의 다시 오심을 간구할 수 없다’는 잘못된 주장을 따르기 때문인 것 같다. 이름 있는 많은 신학자들이 이렇게 주장했고 또 이런 주장을 따르는 이름 있는 신학자들이 아직도 더러 있다.

이런 사람들은, 오순절에 성령이 이미 임하셔서 어디엔가 고여 있는데-소위 말하는 ‘저수지 이론’-그곳은 교회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교회에 이미 오셨으므로 오늘날의 우리는 성령을 다시 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성령은 주신다'는 표현은 일상적인 표현

성경에서, 안수나 기도를 통해 ‘성령을 주신다’는 말은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엄격하게 말하면 지구가 해를 돌기 때문에 밤낮이 생기지만 우리는 통상적으로 ‘해가 뜬다(일출), 해가 진다(일몰)’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사람의 초청 기도나 안수 기도를 통해 성령이 임하시지만, 엄격하게 신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사람의 안수 기도라는 도구를 통해 나누어주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실제적인 체험이 없기 때문에 자기들의 무체험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 구절을 꽈배기 꼬듯 복잡하게 해석한다. 신학교 다닐 때도 학생들의 불만 중의 하나는 교수들이 성경 구절을 지나치게 ‘이론화’(theorize)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성경에는 난해한 구절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누구나 통상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구절도 많은데 학자들은 꽈배기 꼬듯 복잡하게 설명하여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게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성령과 체험과 은사에 관한 이론들이 대표적이다. 체험이 있는 사람은 너무나 쉽게 받아들이는데 체험이 없는 학자들은 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머리 아프고 골치 아플 정도로 복잡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자기들이 실제로 체험하면 성경 구절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

        "아, 나도 드디어 성령을 받았구나!”

  진실은 단순한 경우가 많다.

또한 대부분의 전통적 교회는 ‘은밀하고 조용하게 역사하시는 성령’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 이것은 장 깔뱅의 영향이 지대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깔뱅이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그리스도 예수에 관하여 언급한 내용들이 성령의 비밀스러운 사역(by the secret working of the Spirit)에 의해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 된다”고 말했을 때 개신교 특히 보수주의에서 성령의 향방은 이미 결정된 듯하다.

깔뱅은 성령의 사역을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사역을 우리에게 비밀스럽게 적용시키는 것으로 주로 이해하고(체험적인 측면을 무시), 성령은 주로 말씀을 통하여(은사적 측면을 무시), 주로 우리의 지성과 의지를 조명하여(그는 인문주의의 영향으로 감정을 저급한 것으로 취급),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칭의와 성화의 구원을 이루시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 영향으로 대부분의 보수 신학에서 ‘성령론’은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구원 사역을 신자에게 적용하시는 과정을 설명하는 구원론의 일부로만 다루어질 뿐 역동적인 기름부음이나 기적 행하는 은사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는다. 기사와 이적이 사도시대에 끝났다고 가르친 후 기사와 이적에 대해 다시 가르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리라.

어떤 사람은 깔뱅 만큼 성령을 많이 강조한 사람도 드물다고 하지만, 깔뱅은 한쪽으로 치우쳐서 구원과 관련된 ‘내주하시는 성령’, 즉 ‘중생시키고 성화시키는 성령’(Regenerating and Sanctifying Holy Spirit)은 많이 강조했을지 모르지만 은사적이고 체험적이고 ‘임재하시는 성령’ 즉 ‘사역적이고 체험적인 성령’(Ministerial and Experiential Holy Spirit)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거나 부정적으로 취급했다.

요즈음 일부 전통적 교회에서 강조하는 성령도 그런 것 같다.
“우리 교회에서도 성령을 강조한다,” “우리 교단도 성령을 강조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내주하시는 성령만 강조하고 임재하시는 성령은 외면하거나 무시하여 오히려 일반 성도들의 성령관을 한쪽으로 치우치게 한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성령은 말씀을 통해 조용하고 은밀하게 역사하시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성령은 은사와 체험적으로 다양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기름부음의 구체적인 결과

성경을 통해 기름부음의 구체적인 결과에 대해 살펴 보자.

구약에서는 특수한 몇몇 사람에게만 성령이 임했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주신다(행 2:17). 사람에 따라 능력에 정도의 차이가 있고 은사를 받는 차이가 있지만 모든 신자들이 구할 것은 성령의 능력이다.

성령 체험 곧 기름부음을 받으면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현상을 체험한다. 이하 성령 받음, 기름부음, 어노인팅 또는 성령 체험을 혼용해서 사용한다.
 

-무엇보다도, 여러 가지 초자연적 은사가 나타난다

성령을 받으면 방언은 물론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은사가 나타난다. 특히 고린도전서 12장에 기록된 9가지 ‘기적 행하는 은사’(Miraculous gifts)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은사의 사용으로 인해,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나고, 예언을 하고, 문제가 해결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성경 말씀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많은 경우, 성경 말씀은 읽는 사람의 심령에서 조용하고 은밀하게 역사하지만 기름부음이 임하면 때로는 불이나 방망이가 되고(렘 23:29), 때로는 좌우에 날 선 예리한 검이 되어(히 4:12), 마음을 뜨겁게 하고 심령을 쪼갠다.

필자가 로스쿨(Law School)에 다니는 동안 하나님은 성경 말씀에 대한 특별한 은혜를 주셨다. 빡빡한 로스쿨의 과제를 감당하기 위해 ‘사람의 법’을 공부해야 하는 데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 자꾸만 ‘하나님의 법’인 성경 말씀에 더 마음이 가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고, 성경 말씀을 볼 때 때로는 신기하게도 말씀이 살아서 꿈틀거리거나 튀어나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또한 기름부음이 임하면 말씀에 대한 갈증이 용솟음치고 말씀 삼매경에 들어가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말씀을 보기도 한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면 이전에 대충 지나갔던 말씀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성령 체험이 없을 때는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이란 단어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체험을 한 후에는 도처에 있는 ‘성령’이란 단어가 관심을 끌게 된다.

또한 예언의 은사를 받기 이전에는 고린도전서 14장1절의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에는 관심을 가졌지만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구절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예언의 은사를 받고 난 후 “왜 이 구절에 무관심했을가?” “왜 그 동안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체험이 없으면 이런 구절들은 나와 상관이 없어 보이다가 체험을 통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 것이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할 때 나타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현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파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폭발적인 증인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도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아서 예수의 증인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기름부음을 받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파하자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어찌할꼬?”하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행 2: 4:31). 한편 아레오바고에서 논리적으로 한 바울의 설교는 몇 사람의 신자밖에 얻지 못했다(행 17:34).

조지 휫필드, 찰스 스펄전, 요한 웨슬레, 가까이로는 로이드 존스 목사 등 모두가 어노인팅을 받은 설교자들이다. 로이드 존스의 자서전인 『첫 사십년 에 보면 존스 목사가 처음으로 큰 은혜를 받고 웨이스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방송 설교를 하자 사람들이 그 설교를 전파로 듣고는 회개하면서 데굴데굴 구르는 큰 역사가 일어났다고 한다.

로이드 존스는 또한 평범한 존 리빙스턴 목사에 대해 기록한다.
리빙스턴 목사는 커크 지방에서 주말 내내 부흥회를 인도한 후 상당히 지쳐서 월요일의 설교를 부탁 받고 들에서 묵상하던 중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갑자기 하나님께서 도망가지 말고 가서 설교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그는 에스겔서 36장을 본문으로 하여 1시간 반 가량 설교했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이 임하여 1시간 더 설교했다. 그랬더니 500명이나 회개하는 큰 역사가 일어났다(Martin Lloyd –Jones, Revival, 115-16).

우리 모두가 휫필드가 아니고 스펄전이 아니고 로이드 존스가 아니지만 말씀 사역이나 전도에 있어서 기름부음은 필수적이다.

대부분의 신학교나 설교 세미나에서 설교학을 통해, 설교의 논리성, 설교의 구성, 또 더 나아가서 발성법과 발표술과 같은 설교술(homiletics)은 자세히 가르치지만, 성경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 되게 하는 성령의 기름부음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다.

신학적으로는 ‘말씀은 성령이 사용하시는 도구’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성령의 역사는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 결과 성도들 또한 성령에 대해 말하면 ‘말씀’이 아니라 ‘체험’을 강조한다고 잘못 생각하기 쉽다.

 
-찬양이 살아난다

전통적인 교회에서 찬양은 말씀을 잘 듣기 위한 ‘준비’의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찬양은 준비의 개념도 있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또한 기름부음이 있는 찬양과 그렇지 않은 찬양에는 차이가 있다. 어노인팅을 받은 찬양은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속에 들어가게 한다.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대하 5:13, 14).

1859년 영국 웨일즈 지방의 영적 부흥 기간 중에 일어난 현상이다.

“헤어지기 전에 우리가 사랑하는 목사님이 성만찬을 인도하셨다―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우리 교회에서 시행되어야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하고, 이에 대해 지나가는 말로 몇 마디 언급했을 때, 이전에는 도저히 체험하지 못했던 어떤 영향력이 모든 사람에게 느껴졌다. 우리가 이전에는 전혀 깨닫지 못했던 말씀에 대한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이 있었다.

새로운 빛이 비취는 듯 했다. 그것은 우리를 전기에 감전된 듯 만들었으며 우리 모두가 기뻐서 울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 모두가 영향을 받았다. 가장 강퍅한 마음도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우리는 이상한 감정으로 성만찬에 참여했다. 그리고 우리는 노래를 불렀다. 정말 힘을 다해 불렀으며 찬송가를 계속 반복하여 불렀다―우리는 그칠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이 영감을 받아 계속 노래를 불렀고 마지막 두 소절을 15 분간 계속 불렀다.”
(Thomas Philips, The Welsh Revival, The Banner of Truth Trust, 1989, 12).

요즈음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찬양 예배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아쉬운 것은 기타 치고, 북 치고, 찬양과 경배곡을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기름부음이 없는 찬양은 또 하나의 노래이며 또 하나의 문화로 전락하기 쉽다.

기름부음이 임하면 '새 노래'(New Songs)가 풍성해 진다.
하나님은 새 노래를 좋아하신다.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시 33:3).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시 98:1).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시 149:1).
“항해하는 자들과 바다 가운데의 만물과 섬들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사 42:10).

하나님의 새로운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할 때 사람들은 새 노래를 부른다.
미국의 대각성운동, 요한 웨슬레의 부흥운동, 무디의 부흥운동 때 부흥운동의 주제를 드러내는 새 노래가 홍수처럼 쏟아졌다. 요한 웨슬레의 동생인 찰스 웨슬레는 술집에서 부르는 대중가요 곡에 ‘새 가사’를 붙여서 불렀는데 한국의 새찬송가에 13곡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19세기 말에 미국에서 D.L. 무디의 부흥운동을 체험한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그 당시 유행하던 '새 노래'들을 소개한 것이 한국 통일찬송가의 9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 찬송가 전문가는 말한 적이 있다. 결국 한국의 신자들은 100여년 전 미국 무디의 부흥운동의 ‘새 노래’를 100년 동안 애창하면서 그런 노래가 마치 찬송가의 전형인 것처럼 부른 셈이다.

필자가 부교역자 시절에 미국에서 CCM(현대크리스천 음악)이 한참 유행이었다.
대학생이나 청년들은 부모를 따라 교회에 오기는 했지만 어른들의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찬송과 형식적인 예배에 필(feel)이 꽂히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다가 필자가 대학생부를 맡으면서 CCM을 중심으로 한 ‘찬양과 경배’의 시간을 가졌다. 그랬더니 대학생은 물론 청년들이 예배에 참석하기 시작하고 성인들도 참석하여 예배당이 금방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러자 ‘당회에서 청년들이 왜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찬양 집회에만 참석하느냐? 성인 예배에 참석한 후 찬양 집회를 가지라’고 했다. 어른들은 옛날 찬송을 부르고 사도신경과 교독문을 암송해야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는 옛날 사고방식에 젖어있었고 청년들은 전통적 찬송과 형식을 갖춘 고리타분한 예배에 식상하여 참석하지 않은 줄을 어른들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미국 교회나 한국 교회에서는 세대간의 절충을 위해 한번은 ‘전통적 예배Traditional Worship)’, 다른 한번은 ‘현대적 예배’(Contemporary Worship)를 드리는 교회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때가 90년도 초였다. 요즈음은 한국의 거의 모든 교회가 찬양과 경배를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찬양과 경배가 보편화되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에서 부르는 외국의 찬양과 경배는 거의 전부가 오순절이나 은사주의자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이들의 곡조는 감성적이고 가사도 단순하지만 기름부음이 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이런 곡들이 단순하고 반복적이어서 깊이가 없다고 비판한다. 물론 찬양과 경배에서 단순하고 감성적인 CCM 만 부르다 보면 신앙적이고 교리적 깊이가 없을 수 있으므로 전통적인 찬송가와 섞어서 부르는 것을 필자는 선호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기름부음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노래의 재능만 있는 사람이 외국의 CCM곡들을 부를 경우 귀에 듣기는 좋지만 마음을 잘 움직이지는 못하는 것 같다.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것이 성령의 기름부음이듯 찬양이 찬양되게 하는 것도 기교가 아니라 기름부음이기 때문이다.

 
*찬양 방법이나 형식은 '교리'가 아니라 '문화'로 접근해야 한다

필자는 찬송가의 종류나 방법, 예배 스타일은 ‘교리’가 아니라 ‘문화’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나이가 들어서 예수를 믿은 탓에, 젊은 시절에는 한국의 대중가요, 이미자 풍의 뽕짝 노래는 물론 외국의 팝송도 좋아했다. 아직도 노인들은 뽕짝 노래를 좋아하고 젊은 층들은 힙합 스타일을 좋아한다. 그런데 노인들이 젊은이들의 힙합을 비판하고 젊은이들이 노인들의 뽕짝 노래를 비판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것은 취향과 정서의 문제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전통주의자들이 CCM을 교리로 접근하니까 오히려 문제가 복잡해 지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전통 음악인 국악으로 찬양을 시도하고, 흑인들은 감성이 풍부한 흑인 영가로 찬양하고, 현대인들은 록 뮤직으로 찬송하고, 아프리카인들은 드럼 치고 춤 추면서 정열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이 어떤 형식을 더 기뻐하실까? 하나님은 '형식'이나 '방법'보다는 '동기'나 '기름부음'에 더 관심을 가지실 것이다.

이런 것은 교리와 별 상관이 없다.
사람을 다양하게 창조하신 하나님은 다양한 악기와 다양한 방법으로 각자의 정서, 취향, 기름부음의 정도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찬양하는 것을 하나님은 오히려 기뻐하실 것이다.

중요한 건 방법이 아니라 기름부음이다.
신자들은 이스라엘의 찬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시 22: 3), 항상 찬미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히 13:15).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성령 안에서―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 4:24). 성령 충만한 자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제대로 부를 수가 있다(엡 5:18이하).

기름부음을 받은 찬양은 또한 마귀의 세력을 물리치고 질병과 심령을 치유한다.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니라”(삼하 16:23).

기름부음 있는 찬양을 제대로 부르면 마음과 몸이 치유되고, 능력이 임하고, 하나님의 감미로운 임재 속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찬양과 경배를 많이 하는 사람에게 예언의 영, 치유의 영 강하게 임한다.  찬양을 통해 누구나 쉽게 기름부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기도는 하나님이 일하시게 하지만 찬양은 ‘용사이신 하나님’이 적과 싸우시게 한다(사 42:12-13; 시 149:6-9; 출 15; 수 6:16; 삿 5; 계 19:1-8).
 

-기도에 능력이 붙는다

기름부음을 받은 기도는 능력이 따르고 오랫동안 할 수 있다. 미국의 한 통계에 의하면, 성령 체험 있는 목사들이 그렇지 않은 목사들 보다 하루 평균 3배 정도 길게 기도한다고 한다. 필자도 방언을 하고부터는 기도 시간이 확 늘어나고 기도에 힘이 붙고 기도에 재미가 붙었다.

기름부음을 받은 기도는 또한 마귀의 세력을 물리친다(막 9:29; 엡 6:18; 단 10).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이므로 귀신을 제압하지만 기름부음을 받으면 악령의 세계에 민감해지고 이들을 쫓아내는 능력을 얻는다. 예수님도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으셨고(마 12:28),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서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다(행 10:38).

마귀를 대항하는 전투 기도(warfare prayer)는 기도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 어느 특정 지역이나 단체를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하여 마귀의 견고한 진을 파하는 기도를 말한다.
 

-성령의 외적 능력이 나타난다 

기름부음을 받으면 말씀, 찬양, 기도를 통한 능력은 물론 눈에 보이는 능력의 현상(들)이 나타난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현상들을 보면, 다른 경우에는 구체적인 현상들-방언, 예언 등-을 기록하고 있는 데 사도행전 8장 17절에 기록된 사마리아 성에서의 기름부음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현상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어떤 현상이 일어난 것만은 분명하다. 마술사 시몬은 베드로와 요한이 사람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 받는 것을 육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일부 오순절 교회에서는 그것이 방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방언은 한 가지 대답일 뿐 유일한 대답은 아닌 것 같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났을까?

사도행전에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지만 성령이 임했을 때 어떤 현상이 나타났는지를 성경 전체를 통해 간단히 살펴보자.

-사사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육체적인 완력(physical strength)을 주셨다(특히 삼손)(삿 3:10; 6:34; 11:29; 13:25; 14:6, 19 등).
-하나님의 영이 크게 임하여 사울 왕이 예언을 하고 벌거벗은 채 하루 종일 드러누워 있었다(삼상 19:23-24).
-여호와의 영으로 인해 다윗이 시를 짓고 노래했다(삼하 23:2).
-하나님의 영이 에스겔을 일으키시고 다른 장소로 이동시키셨다(겔 2:2; 3:12, 14, 24; 8:3; 11:1; 행 8:39 참조―빌립을 이끌어 다른 장소로 옮기심).
-꿈을 해석했다(창 41:38; 단 4:18)
-성가대가 일제히 찬양할 때 여호와의 영광―성령―이 구름으로 임하여 모든 사람이 서서 섬기지 못하고 쓰러졌다(대하 5:13-14).

교회사를 살펴볼 때, 웨슬레의 부흥 운동, 미국의 제1. 2차 영적 대각성 운동, A. B. 심슨의 부흥 운동, 20세기의 성령 집회에서, 성령의 능력이 강하게 임할 때 사람들이 울부짖고 웃음을 터뜨리고 귀신이 발작하는 현상들이 자주 있어 왔다. 기름부음이 임하면 말씀 전파 중에, 찬양 중에, 기도 중에, 안수를 통하여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난다.
 

-회개가 터지고 멍에가 부러진다

평소에는 완악하던 사람도 성령의 기름부음이 강하게 임하면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회개가 터져서, 때로는 통곡하면서 몸을 구르기도 한다. 또한 성령의 기름부음은 죄악의 포로가 된 자를 자유케 하고(눅 4:18), 죄악의 멍에를 부러뜨린다. “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사 10:27).

기름부음이 임하면 상처가 치유되고 삶에 드리워진 각종 죄악의 멍에들-탐욕, 중독, 교만, 집착 등-이 부러져서 성령이 주시는 기쁨과 자유를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정결해지고 새로워진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체험한 많은 사람들이 “제가 깨끗해지는 것을 느꼈어요,” “제가 새로워지는 것을 느꼈어요”라고 간증한다. 그 결과 신앙 생활에 자신감이 생기고, 무미건조한 삶에 활력에 솟아나고, 절벽 같았던 앞날에 대한 새로운 기대감이 생긴다.

또한 기름부음을 받으면 갑자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너무나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가 이렇게 아름다울 줄 예전에 미쳐 몰랐다는 감탄사가 쏟아진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누린다

기름부음을 받으면 '하나님에 대한 갈망'(hunger for God)이 용솟음친다. 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신앙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갈급한 심령이 별로 없거나 소멸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은 기름부음을 통해 예수를 증거하고 예수에 대한 열정을 강화해 주신다.
 

-뜨거운 신앙인이 된다

성령의 임재 자체가 올 세대―내세―의 도래이다. 기름부음을 받는 자체가 우리의 삶이 올 세대의 능력에 의해 통제 받는 것을 말한다. 기름부음을 받으면 이 세상의 마지막이 임박했다는 생각이 강해지며 동시에 이 세상 것이 아니라 하늘 상급을 사모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방해하는 짙은 안개가 어노인팅의 강렬한 빛에 의해 그 자취를 감추고, 멀리만 느껴졌던 종말의 산 봉우리가 갑자기 성큼 가까이 다가온 긴박감을 느낀다. 그래서 신앙 생활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가 없다.

무수한 교리나 성경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어노인팅이 결핍되어 무미건조한 신앙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아직도 성경 내용 많이 아는 것을 신앙 생활 잘 하는 것인 줄 알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성령의 열매를 맺어간다

우리가 받는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 받는 것이다(롬 8:29; 엡 1:4 등). 이를 달성하기 위한 일차적인 단계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을 얻는 것이며 이후 신자는 계속 그리스도의 형상―성품―을 이루어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성화의 과정이며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과정이다. 성령의 열매는 다름아닌 그리스도의 성품이다. 성령의 열매인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기 위해 우리는 성령 충만을 받고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갈 5:16; 엡 5:18).

성령의 충만은 한 번만 받는 것이 아니고 계속 받는 것이다. 사역성령충만을 받아야 외적 능력과 은사도 받아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이 되고(행 2:1-4) 생활성령충만을 받아야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고 그 다음에 부부 관계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인간 관계가 해결된다(엡 5:18 이하).
 

-기타 열매들

19세기에 미국의 선교사였던 A. B. 심슨(Simpson)은 어노인팅의 외적인 표적으로 예수 충만(a fullness of Jesus), 경건하고 의롭고 순종하는 삶, 기쁨 충만, 성령의 열매, 지식과 빛을 예로 들었다.

 그 외에도 기름부음을 받으면 나타나는 결과로서는,

-말씀이 꿀 맛같이 달게 된다(시 119:103).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 진다(롬8:15).
-내가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신한다(롬 8:16; 살전1:5).
-긴박감을 가지고 전도한다(행 1:8; 고후 5:13-14).

성령의 도래는 종말론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종말이 오기 전에 죽어가는 영혼이 하루라도 빨리 구원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해 지기 때문이다.

-믿음의 형제를 사랑한다(요일 4:11; 롬 5:5).
-예수의 재림을 갈망한다(고전 16:22; 요일 3:3).
-악령의 존재에 민감해진다(마 12:28; 행 10:38; 엡 6:12).
-현세 축복 보다는 내세 상급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고후 5:10).


기름부음에 대한 태도

성령의 기름부음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구할 마음을 주시지 않는 것을 보니 나에게는 주시지 않는가 보다”라고 하면서 구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 “성경에 성령을 구하라는 말이 없다”면서 구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전 12장13절의 성령 세례와 사도행전의 성령 세례를 혼동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태만한 태도를 가지게 하고 있는가? 두 가지 서로 다른 성령 세례를 구분하지 않은 결과 수많은 신자들이 수준 이하의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잘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미 받은 성령을 다시 구하는 것은 규범적인 것(normative)이 아니다.” 그러면서 자족하고 구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이들의 논리를 한국 교회에서 보편화되어 있는 새벽 기도에 적용해 보자. ‘새벽 기도는 성경의 규범이 아니다. 성경에 예수께서 새벽 기도하셨다는‘ ‘서술적’(indicative) 기록은 나오지만 오늘날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서신서에 보면 사도들이나 그들의 가르침에서 새벽 기도를 했다거나 새벽기도회 하라는 ‘규범적’ 기록은 없다. 그러므로 새벽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새벽 기도는 할 필요가 없는가? 그렇다면 성경에 ‘새벽 기도하지 말라’는 명령은 있는가?

물론 어노인팅이나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시지만 우리가 할 일도 있다. 은사주의자들이 어노인팅을 지속적으로 받는 주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것을 간절하게 사모하고 끈질기게 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꼭 신앙의 성숙도와 상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에서 그것을 오남용하여 위험하다고 해서 구하지 않는 태도를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존 맥아더의 비성경적 주장

그런데, 방언이나 예언처럼 기사와 기적을 행하는 기적 행하는 은사는 사도 시대에 끝났다는 주장을 하는 전형적인 기적 중지론자인 존 맥아더는 성경에서 ‘성령을 구하라’고 말한 곳은 한 군 데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성경은 신자들로 하여금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가 나타나는 것을 구하라고 권면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으며 신약 성경 모두를 살펴볼 때 신자들과 성령의 관계에 대해 명령형으로 말하는 곳은 다음의 다섯 군데 밖에 없다고 잘못 주장한다.

“성령으로 행하라(갈 5:25).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
성령으로 충만하라(엡 5:18).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살전 5:19).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유 20)”
 (John MacArthur, Jr., Charismatic Chaos, Zondervan, 1992, 117; 『무질서한 은사주의』(이전의 『은사 I, II』).

참 희한하다.
필자는 맥아더가 어떤 성경을 보는지 궁금하다. 왜냐하면 필자가 보는 성경에는 성령과 성령의 선물인 은사(들)를 “구하라”고 명령하거나 권면하는 구절들이 여러 군데 있기 때문이다.

-“구하라 . . . . 찾으라 . . . . 문을 두드리라 . . . .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 9, 13).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롬 1:11).
-너희는 더욱 좋은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
-신령한 것(은사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노력하라(고전 14:1).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고전 14:5).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전 14;13).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나게 하노니(딤후 1:6).
-성령을 소멸치 말고 예언을 멸시치 말고(살전 5:19-20).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가?
영적 체험이 없으면 뻔히 있는 성경 구절도 간과하기 쉽다. 필자는 신앙의 초기에 교회에서 통신성경공부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사도행전도 공부했는데 ‘성령’에 대해서 무엇을 배웠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고, 이후에 성경이나 사도행전을 보아도 ‘성령’이란 단어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성령 체험을 한 후 다시 보았더니 성경 도처에 ‘성령’이란 말이 깔려있고 특히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도처에 성령과 성령의 사역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사람은 자신의 체험이 없으면 있는 것도 보지 못하거나 보아도 그 의미를 모르고 지나치기 쉽다. 맥아더는 기적중지론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믿고, 성경에서 ‘성령이나 은사를 구하라’고 명령하거나 권면하는 구절들은 현대의 우리들과는 상관이 없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그 구절들이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착시 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나는 바른 신학과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틀릴 수 없다’는 영적인 교만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오류를 자아낸 것이다.

어떤 사람이 존 맥아더의 『무질서한 은사주의』(초기에는 『은사 I & II』로 번역되었음)라는 책 제목만 보고 ‘혹시 은사에 대해 배울 것이 있나?’해서 읽어보다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늘어놓는 것에 역겨워서 그 책을 갖다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존 맥아더처럼 체험이 없거나 나쁜 체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의 말을 너무나 지당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멈추는 곳에서 멈추어야 한다. 내 지식과 내 체험의 결핍이나 다른 사람을 통한 나쁜 체험의 색안경을 끼고 명확한 성경 구절을 왜곡하고 성령을 소멸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은사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 5: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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