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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비판③] ‘중보 기도’를 오해하거나 폄하하지 말라(1)-정이철, 이인규의 잘못된 ‘중보기도관’ 비판 포함
구요한  |  jk05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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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3.20  16:4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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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비판③]

‘중보 기도’를 오해하거나 폄하하지 말라(1)

-정이철, 이인규의 잘못된 ‘중보기도관’ 비판 포함
 

   
 


들어가는 말

필자는 이미 10여 년에 한국의 예장합동 및 일부 교단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유일한 ‘중보’이시므로 ‘중보기도’라는 용어 대신에 ‘청원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라는 것에 대해 비판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중보기도 용어 사용해도 무방하다

예장합동에서는 중보기도라는 단어가 적합하지 않으므로 청원기도라는 단어를 사용하라고 회원 교회에 지시를 내렸지만 교단의 탁상공론을 비웃기라도 하듯 간판 교회인 사랑의교회 등의 홈피에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대부분의 교회에서도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예장 고신에서도 천주교에서 마리아를 ‘구원의 중보자’(Virgin Mary the Mediatrix)로 여기기 때문에 개신교에서는 다른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단어의 의미’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불러온 혼란들

이인규는 그래도 정이철 보다는 좀 나은 편이다.

‘중보기도라는 의미가 남을 위하여 기도하는 의미라면 부인하거나 비판할 생각이 없다’는 다소 개방적이고 전향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이인규 또한 신사도 운동에서 하는 중보기도는 몇 가지에 의미에서 비성경적이라고 말한다. 조금 후에 이에 대해 다루기로 한다.

(이인규, “신사도운동이 말하는 중보기도의 의미”(http://ikccah.org/NAR/1971, 2012.05.12)

정이철, 이인규는 중보라는 용어 사용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억지 주장한다.

정이철.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바꿔라.”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3026)

----. “용납할 수 없는 이상한 기도”
          (http://www.newsnjoy.us)

----. “에스더기도운동, '모래 위에 지은 집' '그릇된 중보기도 운동은 신사도운동 단체의 공통적인 현상'”(newsnjoy@newsm.com)

이인규. “신사도 운동가들이 주장하는 중보기도”
           (cafe.naver.com/anyquestion)
------. “신사도 운동이 주장하는 중보기도의 의미” ( http://ikccah.org/1971).
 

과연 그럴까?

어떤 ‘단어’는 그 자체가 불완전한 것이므로 한 단어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거나 또는 지나치게 좁게 정의하면 우리가 마음 놓고 제대로 사용할 단어가 어디 있겠는가? 불교나 타 종교에서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가?

성경에서 ‘예수’란 단어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이므로 예수란 이름을 사용하면 안 되는가? ‘예수’는 히브리어 여호수아, 예슈아를 헬라어로 음역한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너무나 많아서 이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구분하기 위해서 ‘나사렛 예수’란 표현을 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김정일’, ‘김정은’이 최고 지도자로 등극하면 동명이인에게 개명을 강제한다고 한다. 일반 백성들이 감히 ‘친애하는 최고 지도자 동지’와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불경죄를 저지를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는 김대중, 김영상과 동명이인이 부지기수이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차이다. 그런데 정이철은 지금 공산주의 식으로 나가고 있다.
 

‘중보’란 단어는 예수님에 대해서만 사용된 단어이므로 우리는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그러면 왜 성경은 히브리어 ‘엘로힘’, 헬라어 ‘데오스’를 문맥에 따라 하나님(God)이나 다른 ‘신들’(gods)에 구분 없이 사용하는가? 인간이 사용하는 단어는 불완전하므로 의미를 문맥과 신학으로 풀어야지 정이철 식으로 단어 자체에 배타적이고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면 제대로 사용할 단어가 거의 없다.

정이철의 논리대로 라면 정이철이 속한 개혁주의 장로교가 말하는 ‘개혁’(Reformed)이란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 받은 ‘개혁된~’(Reformed~)이란 의미로 ‘개혁’이란 말을 당연하듯 입만 열면 사용한다. ‘개혁주의’, ‘개혁신학’, ‘개혁전통’은 그들의 전가의 보도이다.

그런데 성경에도 ‘개혁’이란 단어가 사용된 곳이 단 한 군데 있다.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reformation)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 9:10).

영어성경 KJV과 NASB는 개혁을 reformation으로 번역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개혁’은 구약의 각종 규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월등한 구속사역으로 인해 폐기되고 승화된 개혁을 말한다.

자, 그렇다면 개혁신학과 개혁전통에 문외한인 A가 어느 날 히브리서의 ‘개혁’의 의미를 이렇게 이해한 후, 장로교에 소개되어 장로교인들이 ‘개혁주의’, ‘개혁신학’, ‘개혁전통’이란 말을 입에 담고 사는 것을 보았다고 하자.

어떻게 반응할까?

“이 사람들 큰 일 날 사람들이구나. 예수님의 ‘개혁’도 부족해서 자기들이 인위적으로 계속 무엇을 ‘개혁’해 가야 한다는 말인가? 이단 중의 이단이구나!”

정이철은 A의 주장에 대해 뭐라고 대응할 것인가?
정이철은 A가 똑똑하다고 할 것인가, 무지하고 살짝 돈 사람이라고 할 것인가?
적어도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속으로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정이철이 ‘중보’란 단어에 대해 꼭 이런 식으로 반응하고 있다.
중보기도가 무엇이며 중보기도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 정이철이 성경을 보고 ‘중보’라는 단어 하나만 연구한 후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실시하는 중보기도 전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성령운동이 ‘인간적인 운동’이라면 종교개혁도 ‘인간적인 개혁’인가?

또한, 정이철의 주장대로 ‘성령운동’이란 단어를 사용해서 안 된다면, ‘종교개혁’이란 단어를 사용해서도 안 된다. 어떻게 사람의 힘으로 종교를 개혁하는가? 그런데 반성령파든 성령파든 교회사에서 ‘종교개혁’이란 단어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반성령파들은 ‘성령운동’이라고 하면 마치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을 하는 것처럼 오해하고 비판한다.

자기들이 하는 것은 모두 성경적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며 남이 하면 비성경적이고 인간적인가? 영적 오만과 영적 무지가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종교개혁도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하시는 개혁이고 성령운동도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하시는 운동이다.

인간이 사용하는 ‘단어’의 한계가 무엇이며(예, 불교의 ‘구원’, 기독교의 ‘구원’), 동일한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다르고(예, ‘구원’-영혼 구원, 위기에서 건져냄, 병 고침 등), 상이한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의미가 동일할 수 있다는(예, ‘영혼 구원’과 ‘영생’)는 성경 단어 해석의 기본도 모르기 때문에 정이철은 이런 어리석음과 행패를 부리면서 하나님 나라 확장에 전념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능욕하고 있는 것이다.
 

정이철이 ‘중보기도’, ‘중보기도자’로 번역된 영어책을 한두 권만 보았어도 이런 막무가내 식 주장은 하지 않을 것이다. 중보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중보기도를 intercession 또는 intercessory prayer, 중보자, 중보기도자를 Intercesssor라고 하는데 성경에서는 중보자란 단어로 mediator를 사용한다(갈 3:19, 20 등).

또한 성경에는 모세(갈 3:19, 20)와 예수님을 중보자라 표현했다(딤전 2:5; 히 8:6; 9:15; 12:24). 신학적으로 말하면 모세는 참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예표이자 그림자인 셈이다.

정이철도 “구약의 인간 중보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는 점은 인정한다. (“중보기도 용어를 바꿔라”). 정이철이 말한 대로 모세와 같은 구약의 중보자가 예수님의 예표라면 신약의 중보기도자도 완전하신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예표이다. 구약의 사람들은 앞으로 오실 예수님의 예표이고 교회 시대의 신자들은 이미 오신 예수님의 예표이다.

구약의 인간 중보자들이 부족한 죄인이듯 신약 시대의 인간 중보자들도 모두 부족한 죄인이다. 따라서 신약 시대의 신자들을 중보기도자로 불러도 하등 오류가 없다.

예수님의 3대 직분은 왕, 제사장, 선지자이다.
예수님의 예표인 신자 모두가 왕, 제사장 및 선지자이다. 그런데 신자 모두가 예수님에 해당되는 왕, 제사장, 선지자라고 해서 예수님과 동격이라고 착각하는 신자가 누가 있는가? 그런데 왜 정이철은 유독 ‘중보’라는 단어 하나에 그토록 집착하는가?

 

중보기도자는 구약에만 국한되는가?

‘구약에는 중보기도자가 있었지만 신약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이인규,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중보기도의 의미”)는 이인규의 주장은 신약 중심으로 구약 성경의 내용을 해석하는 성경해석학이다.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구속사역의 관점에서 구약을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칼빈 이래로 개신교는 ‘신약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구약 기록은 무시하는 잘못된 해석학’을 유지해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성경 해석의 원칙은, 덜 분명한 구절은 보다 분명한 구절로 해석하고, 분명하지 않은 구절은 당연하고 필연적인 추론(Good and necessary consequences by deduction)에 의해서 해석해야 한다고 기록하지 신약에 명시되지 않은 구약의 성경 구절은 무효라고 기록하지 않는다.

 마르틴 루터는 ‘신약에서 명시적으로 부인하지 않은 구약 구절은 유효하다’고 했지만 존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은 ‘신약에 명시적으로 기록된 구약의 구절만 유효하다’고 잘못 주장해왔다.

잘못된 해석학의 폐해는 생각 보다 심각하다.

-어떤 교단은 악기 사용에 대한 신약의 해석 차이로 ‘악기파’와 ‘무악기파’로 분열했다.

-초대 교회 당시에 교부들은, ‘신약 성경에 악기를 사용하라’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고, 세상의 술집에서 악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악기 사용을 금지했다.

-제1차 대각성 운동 전까지 미국의 청교도는 칼빈의 가르침에 따라 구약 성경 대로 ‘시편’과 ‘창’(chanting)만 하면서 멜로디 있는 찬양은 ‘천주교의 찌꺼기’라고 부인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예배 때 “시편(들)을 노래하며~”(singing of Psalms~) 라고 기록하지만 대부분의 장로교 헌법책은 ‘시편(들)’이란 표현이 어색했던지 “찬양하며~” 라고 번역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준수한다는 요즈음의 장로교에서 ‘시편만’을 부르는 교회가 있는가? 그렇다면 스스로 신앙고백을 파기하는 것이 아닌가? 찬양과 CCM(현대 교회음악)을 부르는 교회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신앙고백과 신앙고백의 기초가 되는 칼빈의 신학이 틀린 것이다.

-교회는 한때 마귀 소리를 낸다고 하여 오르간 사용을 금지했다.

-불과 1980년 말에만 해도 기타나 드럼(북)은 록앤롤 뮤직이나 아프리카 토속 종교 및 무당들이 사용한다고 해서 교회에서 사용을 금지했다.

아직도 이런 잘못된 생각에 경도된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오늘날 절대다수의 교회에서 도입한 찬양과 악기 사용에 관한 구절은 대부분이 구약, 그것도 시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구약의 지상적 축복은 신약에서 신령한 축복으로 승화되었다’고 했다. 이에 더하여 ‘영적인 것은 고상하고 물질적인 것은 악하다’는 헬라의 이원론이 아직도 교회에 영향력을 끼쳐서 교회는 헌금 이야기, 신자는 돈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을 자랑하는 교회가 많다.

그 결과 실제로는 재정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채 하는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목회자와 신자가 많다. 평균적인 크리스천 보다 10배나 더 잘 부유한 유대인은 부의 원천은 모두 구약이라면서 구약을 무시하는 크리스천을 책망한다.

물론 유대인들은 신약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영혼 구원은 받지 못하지만 구약이 말한 지상적 축복은 크리스천 보다 더 풍성하게 누린다. 신·구약 성경을 모두 가진 크리스천은 영혼 구원은 물론 지상적 축복도 누리면 안 되는가? 복을 받아서 나만 누리는 것이 잘못된 것이지 나도 누리고 남과 나누는 것이 훨씬 더 성경적이 아닌가? 그런데 일부에서는 “가난한 자를 도우라’는 주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가난하게 사는 것”이 더 신령하다고 착각한다.

이 모두가 정이철, 이인규처럼 신약 중심으로 구약을 배제한 잘못된 성경해석학에 경도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의해 폐기된 제사법, 세속 정부로 이전된 시민법을 제외한 구약의 윤리법 및 기타 기록들은 신약에서 명시적으로 금지하지 않는 한 유효하게 인정하는 것이 바른 성경해석학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각 주제를 전체 성경의 맥락에서 살피지 않고 “신약에 구체적인 기록이 없으므로 비성경적이다”(이인규, “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중보기도의 의미”)는 이인규 식의 잘못된 주장은 시정되어야 한다.
 
 

감리교’나 ‘권사’란 용어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가?

이인규는 “신약에서도 ‘중보자’가 있다는 성경적인 증거를 단 하나도 인용하지 못하고 있다”(“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 중보기도의 의미”)고 비판한다. 물론 중보기도라는 단어는 없지만 타인이나 공동체를 위한 중보기도의 개념은 성경 도처에 있다(딤전 2:1-2; 엡 6:19 등).

이인규의 주장대로 목회나 사역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모든 제도나 사역이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야 한다면 그가 속한 ‘감리교’의 존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가? 그의 직분인 ‘권사’ 직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가? 성경 기록을 그렇게 중시하는 이인규가 어떻게 해서 성경에도 없는 ‘감리교’에 속하여 ‘권사’ 직분을 유지하는가? 필자는 감리교나 권사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인규의 잘못된 논리를 비판하는 것이다.

성령운동을 극렬하게 반대하는 미주의 모 한인교단 헌법에 보면 ‘목회자를 청빙할 때 소수의 극렬한 반대자가 있으면 청빙하지 말라’는 조항이 있다.
또한 성령운동을 반대하는 어떤 지도자는 “10년 정도 해보니까 목회가 무엇인지 좀 알겠더라”고 말했다.
이 모든 것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비성경적이고 잘못된 것인가?

이인규의 논리대로 라면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감리교’에서 탈퇴하고 ‘권사’란 직분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데이빗 시맨즈(David seamands)가 내적치유를 주창하던 초기에 거센 비난이 일어났다.

“내적치유하란 말이 성경에 어디 있느냐?”
“교회에서 앰프와 마이크를 사용해도 된다는 그 구절에 있다.”

그런데 요즈음 한국에서 내적치유가 정신분석학 기법과 잠재의식과 같은 심리학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것에 쓸데없는 에너지와 노력을 지나치게 허비하는 사람이 있다.

필자는 그에게 묻고 싶다.

“개혁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을 잘 활용하고 있고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설교학 또한 그렇다. 내적치유가 정신분석학을 활용하기 때문에 버려져야 한다면 개혁신학과 설교학도 버려져야 하는가?”


모든 것을 성경 구절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일견 성경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구체적인 사안도 기록하지만 포괄적이고 일반적으로 기록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일반은혜의 혜택인 인간의 학문이나 과학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성찬식에 대한 해석, 횟수, 방법이 천차만별이지만 이것들은 서로 다른 것이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 ‘기도하라’, ‘남을 위해 기도하라’는 구절은 있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성경은 물론 사역의 현장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를 수가 있다. 그런데 실제로 중보기도를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대충 책을 훑어보고 성경 일반적인 신학과 성경 몇 구절을 인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바른 해석인 줄 아는가?
 
 

의무’와 ‘은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인규의 무지

정이철이나 이인규는 이단을 척결하고 신사도운동을 포함한 성령운동을 비판하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 아마 주변 사람들로부터, “글 (잘) 쓰는 은사가 있다”는 말을 자주 들었을 것이다. 그것도 남을 세우는 글이 아니라 끌어내리고 폄하하는 글을 잘 쓰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글 잘 쓰는 은사”라는 말이 성경에 있는가?

이인규는 또한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기도를 드릴 수 있듯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누구든지 중보기도를 할 수 있다. 그것은 은사가 아니라 기도일 뿐이다”고 주장한다.

신자라면 누구나 기도하고 중보기도 해야 하지만 특별히 남 보다 더 기도를 오래하고, 기도응답을 많이 받고, 기도를 오래 하면 기도의 은사, 중보기도의 은사가 있다고 말한다.

전도는 모든 신자의 의무지만 특별히 전도를 잘 하는 사람이 있고, 신자라면 누구나 찬양을 하지만 특별히 찬양을 잘 하는 사람이 있다.

신자라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의무(duty), 책임(responsibility) 또는 역할(role)이라 하고 그 분야에서 특별히 두드러진 재능과 효과를 보이면 그런 은사(들) 즉 ‘성령의 은사’(Spiritual gifts) 가 있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성령의 은사’를 구체적으로 다룬 곳은 롬 12:6-8; 고전 12:8-10; 엡 4:11; 벧전 4:10-11이며, 그외에도 독신의 은사, 자발적 가난의 은사, 순교의 은사, 예술의 은사, 찬양의 은사, 중보기도의 은사 등이 있다. 세상에서는 무엇을 잘 하면 재능이 있다고 하지만 교회에서 그런 재능을 발휘하면 ‘은사’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불신자일 때 노래 잘 하던 사람, 글 잘 쓰던 사람, 구제 잘 하던 사람은 신자가 되면 그런 재능·은사를 발휘하여 교회의 덕을 세운다.

요즈음 많은 교회에서는 성도들의 은사 발견과 배치 사역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교회가 많다. 일반 기업이나 단체에서 제각기 다른 재능을 가진 직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최대의 효과를 올리듯 하나님의 교회에서도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은사를 주셔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신다.

피터 와그너 『은사를 발견하라』, 빌 하이벨스 『네트워크 은사발견 사역』 등이 있다. 성경이 말하는 은사를 사람에 따라 20여 개에서 30여 개로 다양하다.
 
 

전도, 봉사처럼 중보기도는 신자의 ‘의무’이자 ‘은사’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전도의 은사라고 구체적으로 기록된 곳은 없지만 실제로 보면 전도를 잘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통상적으로 그런 사람을 전도의 은사가 있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다. 모든 신자가 중보기도를 해야 한다.

-중보기도는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된 책임이다(엡 6: 18-19).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신다(롬 8:34).
-성령님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위하여 대신 기도하신다(롬 8:27).
-바울은 자신이 항상 중보기도자의 삶을 살았다고 고백한다(롬 1:9).
-바울은 교인들의 성숙을 위해 해산하는 기도를 한다(갈 4:19).
-바울은 디모데에게도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라고 권면하고 있다(딤전 2:1).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약 5:16).
-구약의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이사야 등.
-주야로 성전에서 금식하며 기도한 여선지자 안나(눅 2:36-38).
-성령강림을 위해 합심 기도한 120 문도들(행1:14; 2;1-4).
-간절히 기도하여 성령 충만을 받은 제자들(행 4:24, 31).

그러나 특별히 중보기도를 잘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을 중보기도 은사자라고 부르는 것은 하등 이상하거나 잘못된 일이 아니다. 교회에서 여러 다른 은사가 많이 필요하지만 특별히 중보기도 은사자들의 활약은 대단하다.
 

설교의 왕 스펄전에게 ‘명 설교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자, 자기가 설교 중 기도실에서 중보기도하는 자들의 ‘영력 발전소’ 덕분이라고 대답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한 사람에게는 충실한 중보기도자, 즉 기도동역자가 있는 경우가 많다.

1872년 D. L. 무디 목사가 영국 런던에서 전도 집회를 가졌을 때의 일이다. 무디 목사가 아침 집회를 인도했는데 분위기가 너무나 냉랭했다 "그토록 힘들게 설교한 적이 없었다"라고 회고할 정도였다.

그런 후 저녁 집회를 위해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집회장소에 들어갔다. 그런데 아침과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보이지 않는 큰 힘이 역사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집회가 끝날 무렵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 무려 500여 명이 일어났다. 이 저녁 집회는 그 지방의 부흥의 불길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사실인즉. 아침 집회 이후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아침 집회에 참석한 한 여인이 그 소식을 자기 여동생인 매리안 애들랜드(Marianne Adland)에게 알려주었다. 매리안은 어렸을 때 병에 걸려 평생을 침대에 누워지내고 있던 신앙심 깊은 부인이었다. 아침 집회의 상황을 들은 그녀는 깜짝 놀라면서 "뭐라고요? 무디 선생님이 우리 교회에 오셨다고요? 만약 오늘 아침에 집회가 있던 것을 알았더라면 나는 금식하며 기도했을 거예요. 지금부터 금식하며 기도하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기도의 결과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매리안 애드랜드는 무디 선생의 충실한 중보기도자, 기도동역자였다.

-조용기 목사와 최자실 목사
-찰스 피니와 아벨 클래리(Charles Finney and Abel Clary)
-빌리 그레이엄과 J. 에드윈 오어(Billy Graham and J. Edwin Orr)
-제리 폴월과 월리 형제(Jerry Falwell and Bro. Worley)
-피터 와그너와 신디 제이콥스 등

이들 모두 훌륭한 중보기도자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큰 일을 할 수 있었다.

피터 와그너는 중보기도 은사자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한다.

- 한번 기도를 시작하면 오랫동안 인도한다.
- 강도 있게 확신을 가지고 기도한다.
- 기도를 즐기며 개인기도 시간을 갖는 것을 만족해 한다. 기도가 노동이 되더라도 그것을 사명으로 알고 기도하기를 계속한다.
- 기도응답이 많으며 또 극적인 편이다.
- 기도의 결과 교회에 유익을 가져오고 영적 열매를 거두게 된다.
-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들을 줄 알고 많은 경우 영분별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함께 갖고 있다.
- 일반인들이 좋아하는 일상적인 즐거움(예를 들면 TV시청, 쇼핑 등)에 별로 마음을 두지 않으며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다.
- 예, 84세까지 성전에서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한 여선지자 안나(눅 2:36-37).
(피터 와그너, 『방패기도』, 56쪽. (8)은 필자가 삽입)

 필자도 나라와 열방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다 보니 피터 와그너가 말하는 중보기도의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위에 적시한 대부분의 내용이 필자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중보기도와 예언적 기도

기도의 제목을 누가 정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필요한 기도 제목을 정하여 기도한다. 그러나 기도 중 때로는 하나님이 특별한 기도 제목을 주신다.

물론 이런 기도 제목은 마음의 부담을 통해서도 오지만 음성, 꿈, 환상을 통해서 오는 경우도 있다. 이런 기도를 성령운동파들은 자신을 위하는 기도일 경우 예언적 기도(Prophetic prayer), 남을 위한 기도일 경우 예언적 중보기도(Prophetic Intercession)라고 부른다. 기도자가 기도 제목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음성이나 깨달음을 통해 기도 제목을 주시는 것을 말한다.

이인규는 중보기도에서 말하는 예언 기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다른 사람을 위하여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가 왜 예언기도가 되어야 하느냐”(“신사도운동이 주장하는~”)고 반문한다.

중보기도에서 말하는 예언적 기도는 ‘예언해 주는 기도’라기 보다는 이인규가 손드라 존슨의 말을 인용한 것처럼 “하나님이 알려 주시는 대로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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