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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철비판②] ‘현대적 찬양과 종교적 황홀경을 오해’하는 정이철 비판건전한 체험의 결핍과 편파적 신학이 낳은 추악한 부산물
구요한  |  jk05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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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3.05  13: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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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이철비판②]

‘현대적 찬양과 종교적 황홀경을 오해’하는 정이철 비판
 

정이철은 빈약한 신학과 성경 지식 및 건전한 영적 체험의 결핍을 바탕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성령의 다양한 사역들을 천방지축으로 비판하고 있다.글로리아타임스는 몇 가지를 골라 바로 잡고자 한다-편집자 주


정이철은 「종교적 황홀경을 경계하라」는 글에서 현대적 찬양을 비판한다.
특히 그는 일부 ‘가사의 내용’과 예배 시 나타나는 ‘영적 현상들’에 대해 천방지축으로 비판하고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
 

(정이철)

“1)'택하신 세대 일으키어'라는 내용은 우리의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신약 성경 어디를 보아도 이 땅을 고치기 위해 택하신 세대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말씀이 전무하다.

이것은 분명히 신사도운동의 거짓 하나님, 즉 사탄을 높이고 찬양하는 내용이다. 신사도운동에서는 이 세상을 영적으로 완성하기 위해 종말에 한 특별 세대가 일어난다고 한다.

……………………………………………………….

겉보기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령한 노래인 것 같으나, 이 노래는 우리를 구원하신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신사도운동가인 데이비드 루이스의 거짓된 하나님, 사탄을 숭배하는 노래이다."

(비판)

교회사적으로 볼 때 모든 세대, 모든 시대가 하나님이 특별하게 택하신 세대이다.

-종교개혁 시대,
-웨슬레의 부흥운동 시대,
-미국의 제1,2영적 대각성 운동 시대,
-디엘 무디의 부흥운동 시대,
-오순절 성령운동 시대,
-은사운동 시대,
-제3의 물결 시대,
-신사도 운동 시대 등

성경과 상황을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은 늘 그 시대에 부합하는 성경의 진리를 새롭게 강조하시고 새로운 처방을 내리시는 분이다.

신자는 모두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특별한 일을 하시기 위해 시대 별, 세대 별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들어쓰신다.

종교개혁을 위해서는 루터, 즈윙글리 및 칼빈을, 영국의 영적부흥을 위해서는 요한 웨슬레를, 미국의 영적부흥을 위해서는 조지 휫필드, 조나선 에드워즈,  찰스 피니 및 디엘 무디 등을 들어쓰셨다.

정이철의 주장 대로라면, “신약 성경 어디를 보아도 이런 세대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말씀이 전무하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모두가 사탄을 숭배하는 거짓 운동가들이다?

 

왜 이런 극단적 주장을 하는가?

정이철과 같은 개혁주의 기적중지론자들은 종교개혁만 참된 하나님의 운동이고 다른 운동은 잘못된 운동이라는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이철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성경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정이철 주장대로 라면, ‘정이철은 거짓 선지자, 거짓 교사이다.’
신약 성경 어디에도 정이철 같은 자가 갑자기 나타난다는 구절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 기록에도 없는데 정이철은 왜 갑자기 나타나서 성령 사역에 찬 물을 끼얹고 있는가?


(정이철)

“2)'주 영광 여기 임하사'라는 부분도 그렇다.
주의 영광이 임한다는 것은 신약의 시대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내용이다. 구약 시대 지성소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셨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모든 성도의 몸과 교회에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신다. 그러므로 결코 구약 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시는 일이 없다.

그러면 데이비드 루이스는 왜 이러한 가사를 지었을까.

신사도운동가들의 집회에는 지금도 구약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신다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있을 때에 그 흔적으로 안개, 구름, 금가루, 금이빨 등이 나타난다고 신사도운동가들은 믿는다. 실제로 그러한 괴이한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것은 귀신들의 장난이지 우리 구원자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아니다. 이 노래가 말하는 '주'라는 단어는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다. 신사도운동가들을 지배하고 속이며 장난하는 사탄을 경배하는 노래인 것이다.”
 

(비판)

정이철과 같은 기적중지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오해하고 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현상을 구약적 현상으로 한정하는 오류를 범한다.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자기들의 신학과 무경험에서 없어진 것이지 실제로 없어진 것이 아니다.

정이철 같은 기적중지론자들은 자기들의 무경험을 바탕으로 ‘기사와 이적은 사도시대에 없어졌다’, ‘사도와 선지자도 없어졌다’, ‘영광의 임재도 신약에서는 없어졌다’고 잘못 주장하면서 마치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인 양 착각하고 수많은 사람들은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3가지 방식으로 존재하신다

-무소부재 (또는 편재. omini presence)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천지에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 139: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

하나님은 천지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서나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동시에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에서는 거룩한 말과 행동을 하면서도 교회를 떠나면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천지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 불꽃 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감찰하고 계신다.

-내주 (內住. indwelling presence)

내주는 구원 받은 신자들에게만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존재 방식이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사람 속에는 성령이 내주하신다(요 14:16-17; 고전 12:3). 성령은 신자의 몸을 성전으로 삼아 내주하신다(고전 3:16; 6:19). 성령만 내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물론 하나님도 내주하신다(고후 13:5; 빌 2:13).

성령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이 신자 안에 신자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비다(요 14:20; 롬 8:1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요일 3:24 참조)

성령이 우리의 심령을 감동하여, 성경 말씀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게 하는 것을 전문적인 용어로는 성령의 내적 증거(internal testimony of the Holy Spirit)라고 한다.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일차적으로 우리의 구원이나 성화와 관련된 사역이다. 성령이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여 우리 몸 안에서 이루는 사역이다(고전 6:19-20; 롬 8:11; 딤후 1:14; 약 4:5; 요일 2:27).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 신자는 말씀을 깨닫고, 죄를 회개하고, 거듭나고, 거룩해져 가고(성화), 마침내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한다. 내주하는 성령은 주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부드럽고 비밀스럽고 은은하게 역사하시면서 우리가 끝까지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을 도와주신다.
내주하시는 성령의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간다.

-임재(臨在. manifest presence)

대부분의 경우 정이철과 같은 기적중지론자들은 성령을 내주하시는 성령으로만 이해해 왔다. 갑작스럽고 뜨겁게 임재하시는 성령에 대해서는 편견과 오해를 가지고 있다. 그 결과 성령 하나님의 또 하나의 존재 방식인 하나님의 임재,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신현(神顯)에는 무관심했다.

-내주하시는 성령이 비둘기 같은 성령이시라면 임재하시는 성령은 불 같은 성령이시다.
-내주하시는 성령이 은밀하게 역사하신다면 임재하시는 성령은 체험적으로 나타나신다.
-내주하시는 성령은 성령의 열매와 관계가 있고 임재하시는 성령은 사역을 위한 성령의 은사나 성령 체험과 관계가 있다.

내주하시는 성령은 주로 서신서에서 말하는 성령이고 임재하시는 성령은 주로 누가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이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보혜사 성령은 위로, 평강과 같은 관계적인 측면의 성령은 물론 가르침과 죄 책망과 같은 내주하는 성령, 기쁨 체험과 같은 임재하시는 성령을 모두 카버한다고 할 수 있다.

"나타나다, 드러나다"(manifest)의 헬라어 파네로는 "숨겨졌던 것을 알게 하거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특히 숨겨졌거나 보이지 않던 것이 외적으로 감각적으로 감지할 수 있게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성령의 은사가 외적으로 오감을 통해 감지할 수 있게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성경은 성령의 은사를 성령의 나타남(고전 12:7)과 동의어로 사용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의 임재는 성령의 내주와는 또 다른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며 '모든' 신자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일부’의 신자들에게만 감지되는 현상이다. 이 때문에 실제로 체험이 없거나 체험의 폭이 좁은 사람들은 많은 오해를 하는 것 같다.

하나님은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시고(출 3:2),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기도 하지만(출 3:2; 수 5:13-15), 많은 경우 지진, 뇌우, 번개, 폭풍과 같은 자연 현상을 통해 나타나시기도 한다(출 19:9-16; 삿 5:4; 시 114-5-8).

특히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는 불과 구름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출 13:21).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는 하나님의 현현(顯現)(manifestation of God 즉 theophany)라고 하며 아람어로 ‘쉐끼나’라고 한다. 여기에서 임재(manifest presence)라는 말이 생겼다.

신약에도 이러한 현상이 기록되어 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그런데 대부분의 정이철과 같은 기적중지론적 개혁주의·보수주의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현현이 모두 현시되었으므로 오늘날에는 특별히 하나님의 현현이란 것이 없다고 주장해 왔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하나님의 현현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나타난 현상인데도 말이다.

이러한 주장이 기사와 이적은 사도시대에 끝났다는 기적중지론과 맞물려서 오늘날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부정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임재의 대표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성령 체험이나 기적 행하는 은사를 부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즉 이들은 하나님의 현현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제한하고 성령의 나타나심―특히 기적 행하는 은사나 성령 체험―은 말씀 속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말씀은 성령이 사용하시는 도구인데도 도구 속에 도구를 들어 사용하는 성령을 가두어 버린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한 체험을 강조하다 보면 말씀보다는 자신의 체험을 내세우기 쉽고 더 신기한 체험을 추구하다 보면 성경의 가르침에 벗어나는 (불건전한) 신비주의에 빠지기 쉬우므로 그런 식으로 신앙 생활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나쁜 면만 보고하는 말이다.

불완전한 이 세상에서는 어떤 것이라도 좋은 면과 나쁜 면을 갖고 있다.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에는 문제가 없는가? 성경 공부, 제자 훈련 등 대부분의 교회에서 실시하는 프로그램에는 이런 취약점들이 없는가? 성경 공부 많이 하고 제자 훈련 많이 했다고 하여 지적으로 교만하여 염소 노릇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바른 교리, 바른 전통만 주장하면 냉랭한 죽은 정통으로 치우치기 쉽다. 그러므로 그런 식으로 신앙 생활하는 것은 좋지 않다.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뜨겁고 신비한 체험도 필요하다"는 사람들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는가?

 
(정이철)

3)"만물이 사모하는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신다는 내용도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성경의 하나님과는 무관한 내용이다.

성령이면 성령이지, 성령의 기름은 또 무엇인가. 성령의 기름이라는 것은 성경에 없다. 성경은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구약 식으로 '기름부음'(요일 2:20,27)이라고 표현할 뿐이다. 이것을 왜곡하여 성령으로부터 anointing이라고 불리우는 어떤 것이 흘러나온다고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신사도운동가들이다.

이 거짓 개념은 80년대에 일어난 빈야드 운동을 통하여 등장하였고, 신사도운동가들을 통하여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많은 사람들이 개념도 없이 입에 담는 말이 되었다. 특히 쓰러지거나, 웃거나, 짐승소리를 내거나, 몸을 비트고 꼬는 현상, 이상한 소리(방언)까지도 이것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우리의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아주 정교하게 사탄을 칭송하기 위해 고안된 가증한 노래인 것이다.

특히 데이비드 루이스가 지은 원 가사를 보면 성령이 'releasing' 된다고 표현되어 있다. 신사도운동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release라는 단어와 outpouring 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성령이 하나님으로부터 방출되어 나타나는 영적인 '힘', '에너지'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성령 이해는 현대의 뉴에이지(new age) 사상이며,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의 영지주의(gnosticism)와도 연결된다.

…………………………….

신사도운동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방출'(releasing)되는 성령의 기름부음에 대한 요설은 바로 이 사상이다. 이 노래의 작곡자도 그러한 사상을 가지고 성령이 하나님으로부터 release된다고 가사를 지었다.”
 

(비판)

정이철은 “성령의 기름이란 것은 성경에 없다”고 단언한다.

과연 그런가?
성령, 성령의 기름부음, 기름부음은 성경에서 자주 동의어로 사용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눅 4:1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그런데 정이철은 ‘기름(부음)’이란 표현은 신약에는 요한일서(요일 2:20,27)에만 있다고 주장한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왜 이런 착시 현상이 나타나는가?
기적중지론자들은 ‘성경의 기사와 이적은 오늘날에는 끝났다’는 잘못된 가정 하에 교리적 해답을 서신서에서만 찾으려는 잘못된 원칙-서신서 중심의 해석-으로 복음서나 사도행전이 말하는 성령은 오늘날의 신자와는 상관이 없다고 잘못된 가정하기 때문이다. 
 

(정이철)

“이것을 왜곡하여 성령으로부터 anointing이라고 불리우는 어떤 것이 흘러나온다고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신사도운동가들이다. 신사도운동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release라는 단어와 outpouring 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성령이 하나님으로부터 방출되어 나타나는 ‘영적인 '힘', '에너지'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성령 이해는 현대의 뉴에이지(new age) 사상이며,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의 영지주의(gnosticism)와도 연결된다”(정이철).

(비판)

과연 그런가?
성경은 성령의 anointing(기름부음), 부어주심(outpouring)을 다양하게 표현한다.정이철이 영어 성경을 한두 개만 보았어도 이런 무지한 주장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anointing(기름, 부어주심), outpouring(부으심)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이철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영어 번역본 마저 이단적이라고 비판하는 셈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because He has anointed me~)”(눅 4:1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God anointed Jesus~)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In the last days, God says, I will pour out my Spirit”)(행 2:17).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Exalted to the right hand of God, he has received from the Father the promised Holy Spirit and has poured out what you now see and hear)”(행 2:33).
 

교회는 20세기초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성령을 주로 ‘힘’이나 ‘에너지’로 이해했다.
그만큼 성부나 성자에 비해 성령에 대한 이해가 빈약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정이철은 다짜고짜 영지주의와 연결시킨다. 그렇다면 20세기 이전의 대부분의 신학자나 신자들은, 정이철의 주장대로라면, 모두가 영지주의자들인 셈이다.
이에 대한 반작용이인지 요즈음 전통주의에서는 ‘성령=인격적인 분’으로 이해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성령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한 위시며 인격체시이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을 ‘일하시는 성령’(Holy Spirit at work-주로 누가의 기록)과 ‘인격체이신 성령’(Holy Spirit as person-주로 바울의 서선시)으로 구분하여 묘사하는 구절들이 많다.

일반적으로 전통파들은 인격적인 성령, 주로 바울이 말하는 성령을 강조하고, 성령파들은 일하시는 성령, 주로 누가가 말하는 성령을 강조하는 성향이 강하다.

전통주의자들은, 성령파들이 누가가 말하는 일하시는 성령을 강조한다고 비판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누가의 성령은 무시하고 바울의 성령만 강조하고 있다.

누가의 성령만 강조하면 외적 능력은 나타나지만 교리나 성령의 열매는 약하기 쉽고, 바울의 인격적인 성령만 강조하면 교리나 차분함은 있는데 외적 능력은 약하면서 전통과 지적 교만에 이르기 쉽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누가의 성령을 강조하는 성령파들 중에 ‘성령의 능력을 방출한다’(release the power of the Holy Spirit)는 표현을 한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성경에서 안수나 기도를 통해 사람들이 성령을 받게 하는 것을 임파테이션(impartation, 롬 1:10)과 비슷한 의미로 릴리즈(release)란 표현을 사용한 것 같다.

정이철과 같은 비판자들은, 성령파들이 자기들에게 생소한 단어를 사용하면 마치 천인공노할 죄인인 것처럼 ‘요설’, ‘뉴에이지’ 및 ‘영지주의’라고 비판한다.

과연 그런가?
개혁주의의 대표적인 벌콥의 『조직신학』이나 개혁주의 신학서적들을 보면 성경 용어 외의 ‘전문 용어’(technical terms)가 도배되어 있다.

-일반은혜와 특별은혜
-원죄의 실재론과 대표론
-삼위일체
-구속사적 성경해석과 모범적 성경해석
-타락 전 구속과 타락 후 구속
-하나님의 존재: 편재, 내주, 임재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등

신학자들은 성경 용어가 아닌 ‘전문 용어’를 무차별적으로 사용하면서 지적 만족과 교만을 누린다. 그러면서 타 단체나 성령파에서 자기들에게 생소한 어떤 전문 용어-예를 들어, 임파테이션, 중보기도, 영적전쟁 등-를 사용하면 온갖 트집을 잡으면서 ‘비성경적이다’, ‘무속적이다’, ‘마귀적이다’면서 비판한다.

이 얼마나 주제 넘은 일인가?

Release 란 단어 사용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 주제인가?
성경에서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성령을 기름부으셨고, 사도들이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게 하듯, 사역자가 하나님의 통로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이 성령을 받게 하는 것을 일부에서 release라 단어로 표현한 것 같다.

성령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영이시기 때문에 ‘에너지의 원천’, ‘힘의 원천’이시다. 그런 성령을 하나님은 사람을 통로로 사용하여 나누어주신다. 그것을 성경에 있는 임파테이션 또는 비슷한 의미로 release란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불교, 다른 종교에서도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기독교에서도 사용한다. 그렇다고 기독교적 구원이 잘못된 것이고 불교적 의미를 가진 것인가?
 

하나님의 특별은혜는 일반은혜의 장에서 이루어진다.


-구약의 엘로힘은 하나님(God) 또는 신들(gods)로, 신약의 데오스는 하나님( God) 또는 신들(gods)로 사용된다. 데오스는 헬라신들의 단어에서 차용되었다(언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의 형식’은 당시 강대국과 약소국의 국제조약을 모방한 것이다(관습).
-할례는 아브라함이 행하기 전에 이미 이방인들이 행하던 관습이다(문화).
-한국 교회에서 귀하게 여기는 새벽기도와 대심방은 선교 초기 무당의 풍습을 따른 것이다(관습).

모든 것이 원래 하나님의 것인데 마귀가 도적질하여 먼저 사용하던 것을(요 10:10) 예수님이 탈환하여 회복하는 것이 곧 구속(redemption)이다.

정이철과 같은 비판자들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스스로의 무지를 드러내는 막무가내식 비판을 자제하기 바란다.

논리학에서는 이런 오류를 ‘일반은혜의 혜택에 대한 오해’(Misunderstanding on the benefits of the General Grace)라고 한다. 한국의 너무나 많은 신학자, 목회자 및 신자들이 이런 오류를 범하면서 성령을 소멸하고 있다.


(정이철)

“4)'주의 향기 머무소서'라는 부분도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내용이다. 이 뜻은 ‘하나님이 임하실 때 특별한 향기가 함께 임한다’는 내용인데, 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임재가 향기를 동반한다는 내용이 없다.

이것도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실 때에 ‘안개, 구름, 금가루, 보석 등이 흔적으로 나타나고, 때로 향기도 동반된다’는 그들의 요설이다. 이 노래가 칭송하는 신은 우리가 믿는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고 작곡자 데이비드 루이스가 하나님으로 믿고 섬기는 거짓된 하나님, 즉 사탄인 것이다.”


(비판)

정이철은 실질적 영적 경험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 동반되는 신적 현상(들)에 대해 무지하기 짝이 없다. 적어도 차분히 앉아 성경을 연구하는 인내나 학구적 태도도 없다. 정이철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거나 생소하면 타인의 내용이나 설명은 볼 것 없이 거짓이 아니면 사탄의 짓이라고 단정해 버린다.

과연 그런가?
앞에서 설명했지만 정이철은 하나님의 임재는 구약시대에 끝났다고 잘못 가정 하기 때문에 이런 오해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는 성경 시대는 물론 지금 시대에도 계속된다. 끝났다고 기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여전히 지속된다고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잘 나타난다.

또한 오늘날 정이철은 하나님의 집회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들)이 성경에 모두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고 잘못 가정하고 있다. 성경의 예시나 기록은 ‘예화적인 것이지 철저한 것이 아니다’(illustrative, not exhaustive).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나타날 때 동반되는 현상들을 모두 기록하는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고 그럴 필요도 없다.

예를 들어, 신약 성경에는 복음을 듣고 회심하는 기록이 나온다.
세례 요한의 설교, 예수님의 설교 및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자동차 안에서 설교 테이프를 듣고 회심한 사람’에게 “성경에 ‘자동차 안에서 테이프 듣고 회심한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므로 당신의 회심은 가짜”라고 한다면 당신은 뭐라고 반응할 것인가?
당신은 그 사람이 살짝 돈 사람이 아닌가 의심할 것이다.

그런데 정이철이 이런 살짝 돈 논리로 하나님의 임재 현상을 비판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실 때에 ‘안개, 구름, 금가루, 보석 등이 흔적으로 나타나고, 때로 향기도 동반된다’는 그들의 요설이다”(정이철).

쓰러지는 현상, 웃는 현상이 기독교 아닌 다른 집회에서 나타날 수 있듯이 이런 현상은 하나님의 집회, 사교의 집회나 심리 집회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상에 대한 분별은 조나선 에드워즈가 제시한 것처럼 현상 자체가 아니라 열매로 분별해야 한다.

☞ [쓰러지는현상⑥] 조나선 에드워즈와 쓰러지는 현상 참조

그런데 정이철은 이런 분별법은 제시하지 않고, “이런 현상이 일어났으므로 그런 집회는 사탄적이다, 그 가르침은 요설이다”는 성급한 결론을 주저하지 않는다.

자기가 하나님인가?


(정이철)

“무아지경, 황홀경에 빠지게 하는 사탄의 술수


찬양에 관하여 주의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감정적으로 고조되어 무아지경으로 황홀경으로 빠지게 하는 사탄의 음모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와 정체성을 실종시켜 버리는 사탄의 또 다른 모략이다. 사탄이 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과 분리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마라"라고 사탄이 윽박지르거나 외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 그것은 성도들이 말씀을 중심으로 예배하지 않고 노래나 다른 것을 통하여 감성과 느낌을 탐닉하다가 결국에 종교적 황홀경(ecstasy)을 좇아가는 병든 신앙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

특히 요즘의 찬양은 동원되는 악기와 가사와 박자의 특성상 사람들에게 쉽게 빨리 감적인 열광을 불러일으킨다. 사실은 술이나 마약으로도 일으킬 수 있는 감정적 고조와 흥분을 예배 시간에, 여러 종류의 악기와 뛰어난 가창력을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의 도움을 입어 조금 다르게 경험하는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기쁨과 행복을 경험하면서 그것이 '성령충만', '은혜', '하나님의 임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비판)

정이철은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고양되어 무아지경과 황홀경에 빠지는 것은 마귀의 짓’이라고 단정한다.

필자는 정이철과 같은 무리들이야 말로 사탄 숭배자, 사탄 연구자라고 말하고 싶다. 어떻게 해서 이들은 하나님의 좋은 것은 모르면서 사탄의 좋은 것은 그렇게 잘 알고 있는가? 이들은 요즈음 하나님이 행하시고 신자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두 사탄 짓이라고 폄하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필자가, ‘정이철은 귀신 들린 경험이 있나 보다. 어떻게 해서 귀신 들린 것에 대해 그렇게 잘 아느냐?’고 했더니 필자가 자기 보고 귀신 들린 적 있다고 말했다고 불평했다. 그렇지 않다면 정이철은 왜 하나님의 집회에서 찬양을 하면서 기쁨과 황홀 체험에 빠지는 것이나 여러 현상들을 모두  마귀의 짓이라고 폄하하는가?


-성경에는 기쁨, 웃음 및 즐거움에 대한 구절이 생각 보다 많다

필자는 성경이 말하는 기쁨, 웃음 및 즐거움에 관한 단어들을 살펴 본 결과, 우리가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한 기쁨보다는 분출하는 기쁨, 터져 나오는 웃음으로 쾌활하고 명랑하게 날뛰면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이 많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만큼 우리는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적인 체험을 주시기 전에는 성경이 말하는 의미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다. 오히려 교회에서 성령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 문제 해결의 확신으로 인해, 위로 등으로 인해 크게 웃고 기뻐하지 않은 것이 잘못되었을 정도로 성경은 우리가 크게 웃고 크게 기뻐하라고 말한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말처럼 비판자들은 정상 이하(sub-normal)의 삶을 마치 정상적인(normal) 것처럼 살아서 성경이 말하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면 오히려 비정상적(ab-normal) 것으로 보는지도 모른다.

다음은 성경이 말하는 몇 가지 단어들을 원어의 의미대로 한 번 풀어보았다.

구약에서

-(히브리어) 알라츠. 기뻐 날뛰다,  크게 기뻐하다.

삼상 2:1 :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알라츠)
시 9:2 :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알라츠)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시 68:3 : 의인은 기뻐하여(알라츠)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찌어다 (심하)

-(히) 심하. 지극히 즐거워하다.

시 21:6 : 저로 영영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심하)
시 45:15 : 저희가 기쁨(심하)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시 68:3 :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찌어다(심하)

-(히) 길.  너무 기뻐서 (몸을) 빙글빙글 돌다.  또는 '소마약'이나 '수스'라는 단어로도 사용됨. 이들의 뜻은 쾌활한, 명랑한. 즐거운이란 뜻임. '라난'은 기뻐서 큰 소리로 외치다는 뜻.

시 2:11 :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길).
시 32:11 :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소마약) 즐거워할찌어다(길)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라난).
시 9:14 :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길).
사 61:10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수스)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알라츠)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같게 하셨음이라.

신약에서

-(헬라어) 카라(명사) 또는 카이로(동사)
신약에서 주로 기쁨과 즐거움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뜻은 조용한 기쁨, 또는 쾌활하고 명랑함이다.

마 2:10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동박 박사들은 별을 보았을 때, 너무나 기뻐서 어찌할 줄 몰랐다. 원어를 직역하면 And seeing the star, they rejoiced a tremendously great joy이다.

여러분은 너무 기뻐서 어찌할 줄 모를 때 어떻게 하는가?
입을 꾹 다물고 표정을 죽여가며 속으로 ‘아, 기쁘다’라고 하는가? 이렇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함성을 지르고 함박 웃음을 터뜨리며 날뛸 것이다.

큰 기쁨이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절제의 은사(?)를 발휘하여 입을 꽉 물고 조용히 웃는다면 정신이 살짝 나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큰 기쁨이 임할 때 기뻐 날뛰고 웃음을 터뜨리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동박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보고 아마 이렇게 반응했을 것이다.

그외에도 카라를 사용한 구절들이 더러 있다.

롬 14:17 :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카라)이라. 
갈 5:22-23 :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기쁨. 카라)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빌 4:4 :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카이로)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헬) 아갈리아오. 크게 기뻐하다, 기뻐 날뛰다.

마 5 12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아갈리아오)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눅 10 21 :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아갈리아오)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이처럼 예수님도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할 때 너무나 기뻐하셨다.

구원을 받은 신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는 자다.

벧전 1:6, 8-9: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아갈리아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카라) 기뻐하니(아갈리아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계 19 7 : 우리가 즐거워하고(카이로) 크게 기뻐하여(아갈리아오)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런데 영혼의 구원을 받은 신자가 과연 얼마나 기뻐하는 삶을 사는가?
늘 파안대소하면서 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주 누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정이철) 

“특히 요즘의 찬양은 동원되는 악기와 가사와 박자의 특성상 사람들에게 쉽게 빨리 감[정]적인 열광을 불러일으킨다. 사실은 술이나 마약으로도 일으킬 수 있는 감정적 고조와 흥분을 예배 시간에, 여러 종류의 악기와 뛰어난 가창력을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의 도움을 입어 조금 다르게 경험하는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기쁨과 행복을 경험하면서 그것이 '성령충만', '은혜', '하나님의 임재'라고 생각하게 된다”(정이철).
 

(비판)

정이철은 무아지경과 황홀체험은 마귀 체험이라고 한다.

과연 그런가?
무아지경이란 말은 동양적인 표현이다.
마음이 어느 한곳으로 온통 쏠려 자신의 존재를 잊고 있는 황홀한 경지를 말하는데 성령파 중에서는 이런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정이철과 같은 비판자들이 넘겨 짓고 사용하는 용어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황홀 지경-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면 자아를 잊어버린 무뇌자가 아니라 죄에서 깨끗해진 자아 즉 정신은 말짱하면서 속사람이 온전히 드러난 자신을 경험한다.

그런데 정이철 식으로 말하면, 이런 좋은 것을 하나님은 못 주시고 사탄만 준다고?
물론 마약, 사교의 황홀체험, 정이철이 밝히는 요가의 쿤달리니 체험을 통해서도 이런 황홀의 극치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알기에 이런 황홀 체험은 후유증이 심각한 것으로 알고 있다. 마약 중독자는 잘못하면 사망하고 쿤달리니 체험자는 이후 심각한 고통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황홀 체험을 20년 이상 누리지만 지금까지 후유증이 하나 없다. 다만 육신을 가진 인간이기에  이런 황홀체험을 보다 더 장기간 지속적으로 누리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반대자들은 성경도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 ‘강한 기쁨과 황홀체험에 대한 무경험’과 ‘조용한 기쁨의 경험’만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평가하기 때문에 이런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제대로 된 성경해석을 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건전한 경험 없는 성경 해석은 이처럼 편파적이고 논리적인 해석만 낳을 뿐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기쁨이야 말로 기독교인의 참된 징표라고 역설한다.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외부의 세상은 교회의 조직적인 노력에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이 관심을 가질 단 한 가지는 사람들이 기쁨의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고대 세계를 이런 식으로 정복했다. 이 사람들의 놀랄만한 기쁨 때문이었다. 비록 그들을 감옥에 집어넣거나, 죽이더라도, 아무런 상관없이 그들은 즐거워하고 환란에서도 즐거워했다"(로이드 존스, Joy Unspeakable).
 

찬송가 작가 아이작 와츠는 이렇게 간증했다.

“나는 1704년 10월 22일에 성령이 주시는 가장 즐겁고 위로가 되는 영향을 받았다 . . . 이것은 1689년에 처음으로 받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 . . .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단어로 표현한 것보다 더 뛰어난 것이었다.
그때 나는 마음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즐거움으로 녹았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 너무나 풍성하게 부어져서 기쁨의 눈물이 내 눈에서 한없이 솟아났다(롬 5:5). 내 마음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완전히 압도당했다.”
 

미국 제1차 영적대각성운동의 지도자인 조너선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이런 체험에 대한 사람들의 비판에 대해 이렇게 항변했다.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을 받은 어떤 사람들이 일종의 황홀경의 상태에 들어가서 자신을 잊어 버리고 강하고 유쾌한 상상의 세계로 넘어가 일종의 환상을 보고 마치 자신이 하늘에까지 올라가 영광스러운 광경을 목격한 것처럼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 일들이 하나님의 성령께 속해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나는 그러한 경우를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일들을 설명하는데 마귀의 도움을 빌릴 필요가 없다. 이러한 것들이 광신적이거나 병든 뇌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나(에드워즈)는 내 뇌가 그런 병에 오래 걸려 있었으면 좋겠다. 만일 그것이 정신착란이라면 인간 세계가 이러한 자비롭고 온유하고 덕스럽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정신착란으로 다 사로잡힐 수 있기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다."
(Jonathan Edwards, “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 Jonathan Edwards on Revival, The Banner of Truth Trust, 1987)

존 파이퍼 목사는 『여호와를 기뻐하라』에서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고 할 정도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0세기의 선지자로 불리는 A. W. 토저(Tozer)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능력있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 체험이 없는 높은 학위를 가진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중시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선지자들의 말을 외면하여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지 못한 결과 변두리에서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이라고 개탄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 한 번이라도 들어가면 오늘날 신자들이 가진 수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과연 오늘날의 정이철과 같은 반·비성령운동파들이 이런 기쁨을 누리는가?

“예배당이 설렁해서 찬 바람이 날 지경이다.”
“예배인지 장례식인지 구분이 안 된다.”

정이철 무리들은 이런 신자들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정이철)

“기독교의 가장 본질적인 DNA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에서 생명과 복이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역사와 생명이 시작되므로 언제나 하나님은 말씀을 주셨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기를 당부하셨다. 인간이 말씀을 바르게 받아야 생명과 복이 시작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하셨다. 성경은 수 없이 말씀을 들어야 함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비판)

말씀의 본질이 무엇인가? 말씀을 듣기만 하면 되는가?
말씀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씀 좋다고 하면 말씀 중심인가?
행위나 적용이 없는 말씀 중심의 신앙은 머리와 귀는 크고, 가슴을 차고, 손발은 마비된 기형신자를 얼마나 많이 양산할 줄 아는가?

뜨거운 찬양은 기도, 찬양, 봉사, 전도의 행위처럼 말씀의 가장 중요한 적용이자 실천 중의 하나이다.


(정이철)

“많은 교회들이 오랜 동안 불렀던 '주의 자비가 내려와'(Mercy is falling)라는 이 노래도 신사도운동가 데이비드 루이스(David Ruis)가 작곡하였다. 이 노래의 가사의 내용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선명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비'(mercy)가 위에서 내려온다고 반복하고 있다. 작곡자가 무슨 의미로 Mercy라는 단어를 썼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이 봄비처럼 위에서 내려온다는 내용이 우리가 믿는 성경의 하나님이 행하시는 어떤 사역과 연관될 수 있는가. 모르겠다. 동아줄을 타고 나무꾼에게 내려오는 천상의 선녀와 같이 위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어떤 역사하심이나 성령의 은사가 있는가. 모르겠다.

물론 노래를 꼭 이런 식으로 따질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속에서 거하시고, 교회 속에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 왜 굳이 위에서 내려온다고 표현하는 것인지 궁금한 것은 사실이다.”

 

(비판)

정이철은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성령 강림이 끝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나 성령은 더 이상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려오신 성령-내주하시는 성령-을 활성화 하는 것이라고 가정 하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비판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의 구절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행 10:44).

정이철 주장 대로 하면, 오순절에 성령이 모두 강림하셨는데 어떻게 해서 고넬료 집에는 성령이 다시 ‘내려오시는가’?
정이철파가 말하는 오순절 성령단회론 주장이 틀렸다는 말이다.

성령은 오순절에 강림하셨지만 지금도 강림하신다. 물론 신자와 교회 안에 내주하시지만 동시에 위에서 내려오신다. 논리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지만 이것이 성경적인 대답이다. 인간이 무리하게 논리적으로 맞추려고 하다 보니까 정이철 같은 오류가 발생하는 것이다.

 
(정이철) 

“우리 도시에서 열린 찬양집회에서도 이 찬양을 불렀다. 그냥 부른 정도가 아니라 일어서서 크게 박수를 치면서, 뛰면서, 웃으면서, 열광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견딜 수가 없어서 나는 그 노래가 다 끝나기 전에 나와 집으로 왔다. 이 노래의 작곡자의 사상도 불건전하고, 이 노래를 가사도 수상쩍은데 그런 노래를 부르면서 성도들이 그렇게 열광한다는 것이 불쾌하였다. 그것보다 더 싫었던 것은 교회의 분위기를 조금 건전하고 술 냄새 풍기지 않고 열광하는 나이트클럽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
구약의 바알종교가 그랬고, 다른 많은 이방종교들이 저랬다. 고대의 유명한 이방 종교들의 사제들이 술이나 최면제 등으로 황홀경에 빠지면서 그들의 신을 만났다. 무당들도 굿을 시작할 때에 먼저 악기와 노래로 자신들의 감정을 흥분시킨다. 부족하면 술을 마시면서 자신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든다. 대나무가 흔들리는 신 내림의 환경과 여건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증한 일이 교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귀신의 장난이 심했던 빈야드 운동과 함께 지금 문제가 되는 찬양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귀신의 역사를 부리면서 그것을 anointing이라고 하고 power evangelism이라고 하였던 존 윔버가 그런 노래를 교회에 앞장서 도입했었다. 경배와 찬양이라는 노래 사역을 시작한 온누리교회에도 더러운 빈야드 영성이 자리를 잡아 버렸다.” 


(비판)

반복하여 말하지만 정이철의 주장은 대부분이 심각한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주장이다.


-모르몬교에서 경전 읽고, 찬송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전도한다.
-A 교회에서 그렇게 한다.
-그러므로 A교회는 모르몬교다 라는 단순한 논리를 제시한다.

 

정이철의 논리는 ‘누워서 얼굴에 침 뱉는 논리’, 부메랑 같은 논리, 남을 비판하는 그 논리로 자신을 비판하는 ‘자충수 논리’이다.
자기는 화성에서 온 별종인가?
사람이라면 신앙에 관계없이 악기와 노래를 통해 흥을 돋운다. 그런데 정이철은 그런 것 자체를 비판한다. 그렇다면 정이철 교회에서는 악기도 사용하지 않고 노래도 부르지 않나?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 문제인데 정이철과 같은 비판자들은 ‘내용’은 보지 않고 ‘형식’만 비슷하면 ‘내용’도 비슷할 것이라는 ‘유유상종의 회합 죄의 오류’(Guilt by association). ‘잘못된 유추의 오류’(False Analogies)에 빠지는 것이다.

☞”왜 성령운동을 대적하는가(2)-논리적 오류” 참조

 

이상 정이철의 글에 대해 비판해 보았다.

정이철의 글은 한 마디로 치우친 성경해석, 편파적인 신학 지식, 건전한 영적체험의 결핍과 교권주의와 교조주의를 바탕으로 한 선동적이고 악의에 찬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대응하는 시간과 노력 자체가 아까운 일이지만 이런 엉터리 글을 믿고 하나님의 사역에 마음문을 닫을 성도들과 부당한 핍박으로 고난 받는 동역자들을 생각하면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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