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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재정③] 부자로 창조된 사람예수님이 가난하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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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9.03  12:3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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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재정③]

부자로 창조된 사람

-예수님이 가난하셨는가?

   

▲ 예수님의 가난은 다른 사람을 부요케 하기 위한 구속적 가난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하나님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어느 날 김진홍 목사가 교인들에게 질문했다.

“의리입니다.”
“사랑입니다.”
“용기입니다.”

김진홍 목사는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소. 바로 돈입니다.
혹시 돈이라고 대답하면 저 사람 돈 밝힌다고 핀잔 받을까봐 그러는 거라면 그렇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우리 사람에게는 하나님 다음으로 돈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돈이 엄청나게 중요하지만 만약 하나님 자리에 돈이 있다면 그 돈은 뭐가 됩니까? 그것을 바로 우상이라고 합니다.
존귀하신 하나님 자리에 재물이나 자식이나 명예가 있다면 그것들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우상숭배는 죄 중의 죄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제일 존귀하고 그 다음으로는 재물이 정말 중요합니다.”

 

청부와 청빈

김진홍 목사는 청부(凊富, 깨끗한 부자)론자라고 할 수 있다. 청부론은 김동호 목사가 『깨끗한 부자』에서 제기했다.

그는 옳지 않은 돈은 거부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사용하여 깨끗하게 돈 벌어서 깨끗한 부자가 되자는 것이다. 그리고 정직한 십일조와 구제 헌금을 하고 난 후에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달에 1억 버는 사람은 십일조 1000만원과 헌금 1000만원 정도 한 후 나머지 8000천만 원은 자기 원하는 대로 써도 된다는 논리인가?

김 목사의 주장은 얼마나 많은 헌금을 했느냐 보다 얼마나 많이 남겼느냐를 중시하신 예수님의 가르침(막 12:42-44; 눅 21:2-4) 및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청지기로서의 사명에 비추어 볼 때 지나치게 단순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김영봉 목사는 김동호 목사의 청부론에 반발하면서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에서 청빈(凊貧, 깨끗한 빈자)론을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부자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칼은 그냥 칼이 아니고 마약은 그냥 마약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칼이나 마약은 위험한 것이다. 돈도 마찬가지다. 돈은 영적인 세력이다. 담뱃값에 <지나친 흡연은 건강에 해롭습니다>라는 문구를 적어 넣은 것처럼 돈에도 <지나치게 많은 돈은 당신의 삶에 해롭습니다>라고 적어 넣었으면 좋겠다."
 

그는 돈의 위험성을 지나치게 경계한 나머지 아예 가난하게 사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 목사가 받은 박사 학위도 버려야 한다. 박사 학위 있다고 교만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명함에 <박사 학위는 당신의 삶에 해롭습니다>라고 써 넣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 사랑이 지나치다.
예수님도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이므로 부모나 자식을 나 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합당치 않다고 하셨다(마 10:35-37). 그러므로 그런 가정집에는 <지나친 가족사랑은 신앙에 해롭습니다>라고 써 붙여야 한다?

오늘날 상당수의 큰 교회 신자들은 전입신자들이다. 그런 큰 교회 앞에는 <지나치게 큰 교회 목회는 영적으로 해롭습니다>라고 써 붙여야 한다? (김 목사는 관료나 지식인들이 많이 출석하는 미국 워싱톤 근교의 꽤나 큰 교포 교회 담임목회자이다).
 

조폭 손에 든 칼은 사람을 상해하지만 의사 손에 든 칼은 사람을 살린다. 마약은 사람을 파멸로 이끌지만 의사 손에 든 마약은 중환자를 살린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불완전한 이 세상에서 ‘어떤 것이 누구에 의해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가’에 따라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돈 뿐만이 아니라 학위, 지식, 은사, 명예, 가족, 취미 등. 그런데 칼은 나쁘고 마약도 나쁘니 돈도 나쁘다는 논리를 적용하면 이 모든 것들도 버려야 한다. 이런 주장은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는 중들이나 할 소리다. 기독교의 비움과 버림은 그런 것들에 ‘집착’하거나 ‘목적’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어서 하나님 나라 확장의 ‘도구’로 사용하라는 것이지 버림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개인적인 가난, 구속적인 가난

김영봉 목사를 위시한 많은 청빈론자들은 마치 성경이 신자에게 ‘가난하게 살아라’고 명령이라도 한 것처럼 오도한다. 아니다. 성경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라’고 했지 ‘네가 가난하게 살아라’고 하지 않는다.

가난한 자가 어떻게 '가난한 자를 도우라, 이웃을 섬겨라'는 성경 말씀에 제대로 순종할 수 있나?
오늘날 돈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의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선교사들도 후원금이 끊어지거나 부족하면 생계를 위해 부업을 하느라고 본업을 뒷전에 두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모두가 가난하게 살면 누가 가난한 자를 도우고 누가 선교 지원을 감당할 것인가?
 

어떤 사람은 예수님도 머리 둘 곳도 없으셨고, 부자 청년에게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고 하셨다고 해서 마치 가난하게 사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착각한다.

아니다. 예수님이나 바울이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바울은)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고후 6:10).

 

본인은 가난하지만 남을 부요하게 하는 가난, 구속적인 가난은 타락한 세상에서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다.

대부분의 주석은 고후 8:9가 말하는 예수님의 가난을 빌립보 2:6-8과 연결시켜서 '영적 가난'으로 해석한다. 이런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다. 왜 고후 8:9의 의미를 근접 문맥과 상관없이 빌립보서 2장으로 비약시키는가? 사도 바울은 고후 8-9장에서 헌금과 연보에 대해 기록한다. 그러므로 고후 8:9는 고후 8-9장의 문맥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 당연히 고후 8:9가 말하는 가난과 부요는 영적 부요가 아니라 물질적 가난과 부요를 말한다.
 

오지의 어떤 선교사는 자신은 지독한 가난과 궁핍에 시달리면서 현지인을 전도하고 양육하여 훌륭한 신자, 훌륭한 사회인, 훌륭한 직장인으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가난을 위한 가난, 남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가난은 무지의 산물이요 무의미한 가난이다.

70이 넘은 어느 목회자의 고백.
가난이 미덕인 줄 알고 물질에 무관심하게 살다 보니까 친구나 가족의 업신여김을 받아 전도도 못하고 영향력도 줄어들고 자신의 삶도 비참해졌다고 한다. 무엇을 위한 가난이었던가? 속아서 잃어버린 세월이 안타깝다고 했다.
 

“가난하면 경건해진다?”

옛날 말이다. 옛날에는 그래도 ‘나물 먹고 물 마시고 들판에 누워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걸식해도 이만하면 족하다’는 풍류라도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의 가난은 궁핍과 질병과 외로움을 안겨주는 저주의 가난이다.

매일같이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빚 독촉 전화, 수개월째 밀린 임대료, 천원 한 장으로 가족과 함께 하루를 살아야 하고, 다음 돈이 어디서 올 지 몰라 애타게 기다리는 비참함과 참담함…. 이런 생활 몇 달만 체험적으로 해보라. 그래도 가난이 미덕이라고 고백하면 그 사람을 존경하겠다.

가난을 예찬하는 사람들, 이처럼 궁핍의 극단에 처한 사람들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어느 정도 누울 자리, 입을 옷, 먹을 거리, 악성 채무가 없는 사람들인 것 같다. 그러니까 가난을 낭만적으로 여기는 것 같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식이라고?’

사람이 밥만 먹고 사나? 잠은 어디서 자고, 추운 겨울에 난방은 뭘로 하고, 자식 교육은 뭘로 시키고? 처자식 없이-또는 내팽개치고-떠도는 독신이 아니면 탁발 중-걸식하는 중-들이나 할 소리다. 성경은 일 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 했고(살후 3:10),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 보다 악한 자라고 했다(딤전 5:8).

영적인 것이 육신적인 것보다 더 귀중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신적인 것을 무시하는 이원론적 사고야 말로 가장 위험한 것이다. 영혼과 육체를 가진 사람에게 시시각각 더 긴급한 것은 육체적 요구이지 영적 요구가 아니다. 귀중한 것과 긴박한 것을 구분해야 한다.

“사흘 굶어 남의 담장 넘지 않는 사람 없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예수님도 아픈 사람 고치시고 굶은 사람 먹이신 후에 전도하시고 말씀 전하셨다. 그런데 때로 예수님 보다 더 거룩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이 많다.

 

원래 부자로 창조된 사람

하나님은 원래 사람을 부자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28).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6).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을 창조하시고 에덴 동산에 두셨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완벽했고 아내이자 이웃인 이브와의 관계 또한 깨알 쏟아지는 사랑의 관계였다. 에덴 동산에서 먹거리와 볼거리를 넘쳐났다. 영혼육의 모든 욕구가 완벽하게 충족되는 상태였다.

사람이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만물통치권이라고 한다. 타락하기 이전에 모든 피조물은 사람의 통치 아래 있었기 때문에 사람은 부족함이 없는 물질적 풍요를 누렸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 이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다. 죄와 허물로 인해 영적으로 죽어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다(엡 2:1). 영권을 상실했다.

둘째, 수명이 짧아지고 육신 연약하여 질병에 취약해졌다.

셋째, 사람과의 관계가 엉망이 되었다(창 3:12-13). 서로 비난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게 되었다.

넷째, 내면이 엉망이 되어버렸다(창 3:10, 12). 창피하고 두렵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죄성이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만물통치권을 상실했다(창 3:17-19). 사람을 위해 창조된 땅이 저주를 받아서 힘들게 땀 흘려 일해야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가 되었다. 땅에 대한 권세가 마귀에게 넘어가 버렸다(눅 4:5-7; 요 16:11; 요일 5:19).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회복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런데 우리는 상당 기간 동안 예수님의 구원사역, 구속사역을 영혼구원의 차원으로 좁게 이해해왔다. 예수 믿고 영혼 구원을 얻으면 죽어서 천국 가므로 교회는 천국대기소 정도로 여겨왔다. 그래서 교회생활 잘 하는 신자를 양산해 왔다. 교회의 각종 예배, 봉사에 열심을 내면 하나님이 가정과 사업을 책임져 주신다고 강조해왔다.

그 결과 교회는 많이들 커졌는데 가정이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가정회복을 위한 가정사역 세미나 결혼세미나 등 각종 세미나를 통해 망가진 가정을 회복하는 사역들이 요즈음 붐을 이루고 있다.

 또한 바른 교리 고백하고 전통 바른 교회 다녀도 내면은 엉망인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내적치유 가계치유 등 각종 내면회복 사역이 붐을 이루고 있다.

 이제 빼앗긴 만물통치권-물권-은 어떻게 회복할 차례이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전도대명령(Evangelical mandate)은 강조하고 또한 실천하지만 또 다른 중요한 명령인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창 1:28)-에 대해서는 소홀하거나 무관심하다. 그러나 요즈음 만물통치권을 회복하는 문화명령에 대한 관심이 점점 확장되고 있다.
 

예수님이 가난하셨는가?

‘예수님도 머리 둘 곳이 없으셨다. 부자 청년에게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신자는 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예수님이 과연 가난하셨는가?

예수님이 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은 가난해서가 아니라 인구 조사로 인해 사람들이 갑자기 밀어닥쳐서 여관에 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 2:7)

예수님은 당시 중산층에 속하는 목수 요셉의 아들이었다. 출생하시자 말자 애굽에 피신했지만 아마 부모의 재물과 동방박사들이 가져온 고가품인 황금과 유황과 몰약 등으로 궁핍한 생활은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머리 둘 곳이 없으셨다’는 말은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배척과 핍박이 심하여 정착하여 편안하게 쉬실 곳이 없었다는 말이다(마 8:20; 눅 9:58; 13:31-32 참조). 예수님도 한때는 기거하는 곳이 있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요 1:39).

예수님은 늘 12제자와 동행하시면서 사역하셨다. 제자 12명을 포함한 13명이 매일 숙식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 중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면서 수많은 병자를 고치셨다. 요즈음에도 기사와 이적을 행하고 신유의 은사를 행하면 많은 물질들이 들어온다. 그래서 가룟 유다가 재정을 맡은 정도로 금전적 어려움은 없었을 것으로 본다.

예수님도 헌금이 들어올 때마다 모든 금액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신 것 같지는 않다.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요 13:27-29).

가룟 유다가 헌금을 훔쳤음에도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한 것을 보면 헌금 잔액도 상당액이었음을 알 수 있다(요 12:6).

또한, 헤롯 왕 비서실장의 아내 같은 부유층 인사들이 재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다.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눅 8:3).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입으신 옷은 통으로 짠 옷인데 간수들이 제비 뽑아 나눠가질 정도로 질이 좋고 비싼 것이었다(마 27:35).


이처럼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물질적 부족함을 느끼면서 사시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사치나 호의호식을 하신 것 같지는 않다.

예수님께서 12제자를 거느리고 순회 전도 집회를 하시면서 오병이어의 기적, 칠병이어의 기적을 등을 행하실 정도로 능력이 뛰어나신 분인데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궁핍하게 사셨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언제 가난하셨는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였다. 중 죄인 취급 받아 겉옷을 포함한 모든 것을 다 박탈당하고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가난하게 돌아가심은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한 구속적인 고난이자 가난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만일 부자 청년이 가진 재산 모두를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었다면?

이후에 가난해졌을까?
이런 생각은 세상적, 불교적 생각이다.
성철(불자)은 석가 마호멧 예수 모두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은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석가의 불교, 마호멧의 이슬람교, 예수의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들은 어떻게 사는가? 불교와 이슬람국가들은 가난에 찌들대로 찌들어서 짐승 같이 사는 사람들이 많은 국가들이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국가들-서구와 북미-은 많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부유한 국가들이다.

무슨 차이인가?

석가와 마호멧은 부유한 삶을 버리고 가난하게 살면서 다른 사람들도 가난하게 만들었다. 예수님은 가난하게 사셨지만 다른 사람들을 부요하게 만드셨다.

불교의 버림은 버림을 위한 버림이지만 기독교의 버림은 채우기 위한 버림이다. 이것이 서로 다른 점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나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은 막으시고 이삭을 다시 아브라함 품에 돌려주셨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이전의 이삭은 아브라함 개인의 '집착'과 '욕망'의 대상이었을지 모른다. 하나님은 그것을 경계하셨다. 그러나 이삭을 서슴없이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중심(中心)을 보신 하나님은 이삭을 되돌려주셨다.

이제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더 이상 개인적인 집착과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이 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서 이삭의 부모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시험하신 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가 이지 이삭 자체를 빼앗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비움은 욕망의 대상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불교는 집착과 욕망의 대상을 하나 둘 비우다가 결국은 직업이나 사업, 가족을 버리고 속세를 떠나 출가한다.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인 가족, 직업 및 삶의 즐거움과 보람조차 버려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그러니까 불교가 들어간 나라는 기왕의 일부 극소수 기득권층을 제외하고는 엄청나게 가난하다. 무조건 버리고 비워야 하는데 발전되고 누릴 것이 뭐가 있는가?
 

불교의 이런 사상이 1세기 경에 기독교에 영향을 미쳐서 나중에 천주교는 사제나 수도사들에게 가난 서약과 순결 서약을 하게 했다. 재산 소유를 금함은 물론 부부 간의 성(性) 관계도 출생 이외의 쾌락을 위한 목적은 금했다고 한다. 오늘날 이런 사조가 교회에 여전히 남아있어서 부부 간의 성 문제로 인해 가정이 파탄되고 불행하게 사는 부부들이 너무나 많다.

가난에 있어서는 아시시의 프란시스가 대표적이다. 재산 상속으로 부자였던 그는 가난한 자에게 모든 재산을 나눠주고 청빈한 삶을 살면서 수도원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가난하게 살았을 뿐 아니라 수도사들에게도 무소유를 서약하게 했다. 얼마나 지독했느냐 하면 어떤 수도사가 죽었을 때 지갑 속에 동전 2개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그를 파문시켰다고 한다.

“나도 가난하니 너희도 가난할 지어다?”(프란시스의 생각을 패러디한 것).

 

만일 부자 청년이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었다면?
가난하게 되었을까? 아니다. 더 부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1: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 18:29-30).

예수님이 재물이나 가족을 버리라고 하심은 재물이나 가족에 대한 집착과 탐심을 버리라고 하신 것이다. 시험에 합격하면 여러 배에서 백 배까지 더 주신다. 핍박은 받지만 가난해 지는 것은 아니다.

 

영혼육의 축복 회복을 위한 예수님의 구속사역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사역은 잃어버린 영혼 구원은 물론 빼앗긴 영혼육의 축복을 모두 탈환하는 것이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들)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마 12:29).

예수님은 광야 40일 금식 후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심으로써 강한 자를 결박하셨다. 결박하신 후 본격적인 사역에 들어가셔서 강한 자 마귀에게 빼앗긴 세간들인 영혼은 물론 모든 것들-물권 포함-을 강탈하신다. 우리도 예수님의 권세에 힘입어 빼앗긴 세간들을 강탈해야 한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신적인 생명, 영원한 생명은 물론 이 땅에서 누리는 풍성한 생명을 포함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가난은 저주이고, 내 배 부르니 족하다는 자족은 이기적이고, 풍성한 삶이 성경적이다. 내 삶이 풍성해야 남을 도울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내 삶이 가난하면 마음은 있지만 실제로 돕지는 못한다. 그리고 가난이 지속되면 '어디서 돈이 올까!'라고 기대하면서 사람이 비굴해지고 나약해진다.

세간(들) 강탈, 풍성한 생명을 영혼 구원과 영적 축복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영혼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는 헬라적의 이원론적인 해석이다. 히브리적인 해석은 영혼과 육체 모두가 선하다고 보며 그들이 말하는 축복은 영혼육의 모든 축복을 말한다.

교회는 지금까지 헬라의 이원론적인 사상에 젖어 신령한 축복은 강조하지만  물질축복을 실제로는 간구하면서 신학적으로는 무시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헌금을 많이 하라고 하면서도 복 받는 방법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 신자들은 신자가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사는 것이 경건하고 미덕인 것처럼 잘못 생각해 왔다.
 

가난은 절대로 미덕도 아니고 권장할 것도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가난은 죄와 심판의 결과이자 마귀의 장난이다. 성경은 ‘가난한 자를 도우라’고 했지 ‘네가 가난하게 살아라’고 한 구절을 한 군데도 없다. 만일 신앙을 위해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산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선택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그 만큼 하나님 나라 일을 제대로 할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생각 저런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마귀에게 만물통치권을 빼앗겨서 가난하고 궁핍하게 살면서도 탈환하여 누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만물통치권을 도둑질한 마귀는 마치 자기 것인 양 행세하고 있는데 정작 빼앗긴 신자들은 멀뚱히 구경만 하고 있다.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눅 4:5-7).


이렇게 생각해 보라.

당신의 조상이 엄청난 부자였는데 희대의 사기꾼에게 속아서 당신은 지금 가난하게 살고 있고 사기꾼 부자는 호화롭게 살고 있다. 당신은 그 사실도 모르고 부자를 부러워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부자의 재물은 당신 조상의 것을 사기친 것이며 당신은 재판을 통해 그 재물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한다. 당신은 가만히 있을 것인가? ‘다 지난 일인데 뭘’ 하면서 가만히 있을 것인가,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하여 법정투쟁을 벌일 것인가? 한편으로 분개하고 한편으로 기대감을 갖고 당연히 사기 당한 재산을 탈환하려 할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신자 여러분이 바로 사기 당한 당사자이다. 마귀에게 빼앗긴 재산을 탈환하는 것은 탐욕의 문제가 아니라 회복의 문제이다.

성경이 금지하는 것은 돈에 집착을 갖고 억지로 탐욕으로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방법으로 부자가 되는 것을 금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의인을 부자로 만드신다.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잠 3;33).

“이는 나(하나님)를 사랑하는 자가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잠 8;11).   

 “의인의 집에는 많은 보물이 있어도 악인의 소득은 고통이 되느니라”(잠 15:6).

 “온전하게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의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잠 20:7).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잠 10:22).

어떤 사람은 왜 구약만 잔뜩 인용하느냐고 비판할 지 모른다.
그런 사람은 이 시리즈의 첫글을 읽기 바란다.
유대인은 구약 대로 살아서 비록 영혼 구원은 받지 못했지만 재정을 포함한 지상적 축복은 어느 민족 보다 풍성하게 누리고 있다.

크리스천은 영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지상적 축복과는 무관해야 하는가? 아니다.
죄와 마귀에게 빼앗긴 재물을 탈환하는 것은 단순히 부자가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의 의무이자 권리이다.
 

가난하면서도 악한 자도 많고 부자이면서 악한 자도 많다. 물론 가난하면서 선한 자도 많고 부자이면서 선한 자도 많다. 어느 쪽에 선한 자가 많은 지는 가리기 쉽지 않다.

오히려 가난에 찌들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사람도 많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모든 가난을 부자의 탓, 정부의 탓으로 돌리는데 이것도 잘못된 것이다. 가난의 원인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다룬다).

가난한 자가 더 경건한 것도 아니고 부자가 덜 경건한 것도 아니다. 가난했다가 갑자기 부자가 되면 믿음이 따라 가지 못해서 오히려 재물이 방해가 되기는 한다. 그래서 성경은 재물이나 부자에 대한 경고가 많다. 그러나 그런 경고는 재물에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님 보다 우선순위에 두는 모든 것-재물, 가족, 학위, 명예, 자기 영광, 세상 영광, 은사, 심지어는 '나는 가난하게 산다'는 자기의 등-이 경고의 대상이다.

인색하고 탐욕스런 부자도 있지만 아브라함, 이삭, 욥, 솔로몬처럼 경건한 부자도 있다. 부자로서 경건하게 살면서 구제도 많이 한 석유왕 록펠러, 철강왕 카네기, 백화점왕 워너메이커 등도 있다.

하나님은 이제 영혼구원-관계회복-내면치유-물권회복의 순서로 빼앗긴 모든 것을 회복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신자가 마귀에게 빼앗긴 물권을 회복하여 부요한 삶을 누리는 것은 원래 하나님의 뜻이여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중요한 일부이기도 하다.
 

수정된 청부론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타락과 구속의 측면에서 부요와 가난 문제를 조명해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자의 수정된 청부론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수정된 청부론의 요지는 이렇다.

하나님은 원래 사람을 부자로 창조하셨다-에덴 동산의 축복. 타락으로 인해 영혼은 물론 재물-물권-을 마귀에게 도둑 맞았다. 예수님은 빼앗긴 것들-영권, 인권, 물권-을 탈환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여기서 말하는 영권, 인권, 물권의 ‘~권’을 ‘권리’, ‘권능’이란 의미 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권세’로 이해하면 오해가 없을 것이다.)

신자는 이제 예수 이름의 권세로 빼앗긴 재물도 탈환해야 한다. 탈환한 재물은 나도 누리고-무한정 누림이 아닌 ‘제한된 누림’-청지기 사명을 감당하여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전도, 선교, 구제 등. 요즈음 일터사역자들 중에서는 십의 1조에 만족하지 않고 십의 2조, 3조 심지어는 소득에 따라 9조까지 누진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

결국 재물과 돈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청지기인 신자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탈환하고 창출하고 누리고 나누는 '도구'이자 '수단'이다. 소유하려고 하니까 유혹, 탐심, 착취, 인색이 끼어드는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말하는 수정된 청부론이다. ‘수정된 청부론’은 기존의 청부론과 청빈론에서 다루지 않은 부의 창출 및 부의 탈환을 포함하여 부의 누림과 부의 나눔을 철저하게 성경 말씀의 바탕에서 행하는 것이다.

 

필자는 ‘크리스천과 재물’에 대한 책들-학문적 책과 목회적 책-을 나름대로 읽어보았다.
대부분의 청빈론자들은 돈을 어떻게 써야 할 지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어떻게 벌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 하지 않는다. ‘부자는 가진 돈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진보좌파는 이에 더하여 ‘정부가 제도를 개선하여 정의와 공정을 보장하고 복지정책을 제대로 수행하라’는 정도이다.

물론 이런 것도 필요하다.
그러면 가난한 자는 평생 얻어 먹고 살아야 하는가? 가난한 자를 부자로 만들 대안은 없는가? (하기야 청빈을 이상적으로 간주하는 그들이 가난한 자를 부자로 만드는데 신경을 쓰겠는가? 부자가 재산 나누어주기를 촉구할 뿐이지 가난한 자가 분발하여 부자가 되라고 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돈이 가만히 있으면 굴러들어오는가?
돈 벌기처럼 힘든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한국의 많은 보편적 복지론자들도 ‘OECD대비 한국의 복지 수준은 이렇다. 이런 분야에 복지를 더 늘려야 한다고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복지 재원이 어디에서 나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장 없는 과잉 복지의 재앙을 PIIGS국가들(포르투갈, 아일랜드, 이태리, 그리스, 스페인)의 국가 디폴트(채무불이행)을 통해 똑똑히 목격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현재 전 세계적인 불경기의 여파로 세금 수입이 줄어들어 긴급 추가경정예산을 꾸릴 정도다. 그런데도 포퓰리즘적 복지 공약으로 인한 복지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빚 내서 공약을 실현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일각에서는 복지를 더 늘리라고 아우성이다. 언제까지 빚 내서 먹여 살릴 것인가? 경제가 성장해야 세금수입이 늘어나고 복지 수요도 감당할 것이 아닌가.
 

개인 경제도 마찬가지다.

교회는 이제 ‘돈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에 대한 주장도 해야하지만 ‘어떻게 벌 것인가’에 대한 대안도 제시해야 한다.

어떤 목회자는, 정부가 복지 정책을 잘 써서 사람들의 가난 문제를 잘 해결해 주었으면 한다는 요지의 글을 썼다. 물론 정부의 복지 정책도 중요하다. 그러나 복지 정책은 기껏해야-자체 연금보험을 제외하고는-최저 생계비를 지원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자녀가 복지 지원금 정도로 만족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부요법칙에 따라 빼앗긴 부를 적극적으로 탈환하여 나도 누리고 남에게도 나누는 것이 더 나은 삶이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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