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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영수박사] 조지 휫필드-대각성운동을 완성시킨 불의 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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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7.13  19: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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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대각성운동의 역사]

조지 휫필드 목사 :
대각성운동을 완성시킨 위대한 불의 사자

   


예영수 박사(Ph. D, Th. D., S Ed. D.)
LIFE신학원 총장
국제크리스천학술원 원장
한국기독교영성총연합회 총재
 

   
▲ 조지 휫필드의 집회에 모인 청중들

조지 휫드필드: 생명력 있는 설교가

1734년부터 1736년까지 매사추세츠주 노샘프톤에서 부흥 운동이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를 중심으로 불이 붙기 시작하였으나, 이 부흥 운동의 불꽃을 대각성운동으로 결속시킨 사람은 성공회의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였다. 에드워즈 목사가 대각성운동의 밭을 가는 터전을 놓았다면, 휫필드 목사는 권능 있는 설교로서 대각성운동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죤 웨슬리의 부흥 운동이 영국을 위해 이루어졌다면, 그의 동역자인 죠지 휫필드의 부흥 운동은 식민지 미국을 위해 이루어졌다. 휫필드는 옥스포드의 동급생들이 별명 지어준 “아주 엄격한 형식주의자”란 뜻의 “메소디스트”(감리교)로 처음 불린 사람이었다.

“옛빛” 과 “새빛”이 갈등을 빚고 있는 동안에 1739년 10월 30일에 조지 휫필드가 미국 중부 식민지에 도착했다. 윌리엄 텐넨트(William Tennent. Sr.)목사는 휫필드 목사를 초청하여 “새빛” 목회자들을 위해 설교를 부탁했다. 필라델피아에서의 휫필드의 극적인 설교는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으며, 심지어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프랭클린은 휫필드의 음성이 30,000명의 군중들 앞에서도 설교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이후 이들은 평생의 친구가 되었으며 서로가 존경하게 되었다. 프랭클린은 필라델피아에 휫드필두 목사가 설교할 수 있도록 큰 건물을 세웠는데 그 건물이 오늘날의 펜실바니아 대학이 되었다.

휫필드의 설교는 “옛빛”과 “새빛”의 갈등을 뒤로 돌리게 하고 모라비안, 퀘이커, 영국국교, 장로교, 침례교, 회중교 등 모든 교단으로 하여금 영적 갱신을 경험하게 했으며, 서로의 다름을 제쳐놓고 서로 협조하게 만들었다.

필라델피아에서의 윗필드의 성공은 압도적이었다. 윌리엄 텐넨트 목사는 이 대각성운동이 지역 목사들의 반대 없이 위대한 대중에게로 이어지기를 원했다. 그 해 11월 12일 휫필드는 필라델피아를 떠나서 뉴저지로 갔다. 그는 뉴브런스윅에 있는 길버터 텐넨트의 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성공회가 그를 거절하자 장로교 목사가 그를 초청하였는데, 수많은 군중이 모였다. 그는 텐넨트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탄하여 “나는 이런 통찰력 있는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의 가슴에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케 할 만큼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선자들은 회심하던지 분노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는 우리의 아들이며, 인간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는 분이다”라고 격찬했다.

 

휫필드: 복음의 확산자

휫필드는 뉴욕, 뉴저지, 필라델피아에서 설교하는 동안 데오도르 프레링하이젠을 만났으며, 패레링하이젠과 그의 주변의 목사들이 대각성운동을 위해 많은 일을 한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길버트 텐넨트 목사는 휫필드를 초청하여 시골 풍치가 잇는 “통나무대학”으로 그를 안내하여 옥스퍼드 출신인 그의 아버지 윌리엄 텐넨트 목사를 만나게 했다.

휫필드는 1740년 뉴잉글랜드 지방을 순회하면서 설교를 계속함으로써 대각성운동을 확장시켜 나갔다. 그는 1740년 9월 14일부터 10월 29일까지 메인 주에서부터 코넥티컷 주에까지 설교를 했는데 사람들은 마치 전류에 감전된 듯했다. 보스턴 집회에서는 5000명이 모였으며, 올드브릭(Old Brick)교회에서의 주일 설교에는 8000여명이 모여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1740년 10월 12일 보스턴에서의 작별 설교에서는 20.000명이 모였다.

그는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복음을 전했으며, 1740년 10월 17일(금)에는 노셈프턴에 가서 에드워즈 목사를 만났으며, 그곳에서 4번 설교했다. 휫필드의 설교는 이 교회의 전날의 부흥을 깨우치게 하여 목사와 교인들 모두가 울었다. 휫필드는 에드워즈 목사의 아름다운 가정 분위기와 사모의 온화함과 수수하게 차려 입을 자녀들의 믿음에 감동을 받았다.

휫필드 목사는 남쪽으로 선교여행을 계속하면서 길버트 텐넨트 목사를 만나 최근에 일어난 성령의 불길을 일으킬 것을 권유했다. 이에 텐넨트 목사는 1740년 12월에 보스턴으로 가서 휫필드와 같은 역사를 일으켰다. 각성운동은 계속 확대되어갔다.

교회사가들에 의하면, 대각성운동 기간동안 많은 설교자들 중 그 어느 누구도 휫필드보다 더 많은 복음 전파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개의 역사를 불러일으킨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1750년 인구가 겨우 34만 명이었을 때, 이 기간 동안에만 25,000명 내지 50,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뉴잉글랜드 지방에 있는 교회에 등록했다. 미국 중부지방에서는 20년간 침례교 목사가 21명에서 79명으로 늘어나고, 장로교 목사도 2배 이상 증가했다. 남부에서는 그 후에 이루어진 침례교의 놀라운 확장을 위한 튼튼한 기초를 닦아 놓게 되었다.

 

성령의 권능아래 쓰러지는 현상

이러한 놀라운 부흥은 휫필드의 열정적인 뛰어난 설교에 더하여, 그의 복음전파 여행의 특별한 열매인 사람들이 성령의 권능아래 쓰러지는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휫필드의 젊은 시절, 존 웨슬리와 함께 영국에서 사역할 때 사람들이 쓰러지는 현상을 보고, 그는 편지를 써서 웨슬리에게 반박하기를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집회 때 사람들을 자극하여 발작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했다. 그러나 다음날 휫필드가 설교할 때 “그의 가까이 서있던 4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쓰러졌다. 그중 한사람은 아무 감각도 없이 움직이지 않았고, 다음 사람은 심하게 떨었고, 세 번째 사람은 온몸의 충격이 너무 심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신음하기만 했고, 그리고 네 번째 사람은 같은 충격을 받아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그 이후, 휫필드가 미국으로 건너와서 설교할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지는 현상은 일상적인 일로 나타났다. 어떤 사람들은 죽은 듯이 창백했고, 다른 사람들은 양손을 마주 잡고 뒤틀었고, 더러는 심하게 울음을 터뜨리고, 어떤 사람들은 조용히 울었다. 더러는 땅 바닥에 쓰러져 누워 있었고, 더러는 친구들의 팔에 쓰러져 부축되어 있었다. 설교가 끝났을 때 사람들은 몸이 땅에 붙어 버린 듯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휫필드 목사의 집회에서 사람들이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울부짖으며, 쓰러져서 죽은 듯이 보이기도 하고, 1803년경쯤에는 이런 회심의 운동이 점차 유행이 되었다. 수많은 남자와 여자가 너무나 많이 쓰러지니 그들을 밟지 않고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그들을 서둘러 집회 장소로 옮겨 놓았다. 언제나 집회 장소의 바닥의 절반 이상이 쓰러진 사람으로 덮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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